아무도 읽지 않은 책

시4

by 강민선

나는 어디에도 없는 목록

독서광, 책수집자, 서평가, 평론가 누구도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

수억광년 시간 속에서 나의 과거는 점점 무상해져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이

아주 멀리 떠나온 것 같아


그런 나에게도 자리가 있어

궤궤한 도서관 한곳에 꼿꼿이 서서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해

“여기선 아무도 길을 잃지 않아”

아득해지는 발걸음

천국이 도서관과 같을 거라던 철학자도

나의 존재는 까맣게 모를 거야

침묵하는 질서 속에서

길을 잃은 건 나뿐일까

나를 깨우며 동시에 잠식되는

무수한 독백들


저녁놀이 주홍빛 융단처럼

서가마다 촘촘히 드리워질 때면

숨 한 번 크게 쉬고 싶어져

아- 하고 입을 벌려 보지만

뭉개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가늘고 힘없는 휘파람 소리

마르지 않는 침샘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침몰하는 질서 속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린다


(2016.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