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서함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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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_pm02:15

by 강민선


모두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타임머신이다. 단지 대부분 사람들의 타임머신은 고장 나 있을 뿐이다. 가장 이상하고 어려운 시간 여행 방법은 다른 무엇의 도움도 받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 곳에 붙잡히기도, 순환 고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시간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타임머신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게 제작된, 우리 내부에 타고 있는 승객에게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해주는, 시간 여행, 상실, 그리고 이해를 경험하게 해주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타임머신인 것이다. 우리는 가장 완벽한 고객 맞춤 설비를 갖추고 제작된 전천후 타임머신이다. 우리 하나 하나 모두가.
-찰스 유,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중에서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 내보려고 타임리프 소설을 시작한 적이 있다. 작년 1월 말 응모마감이었으니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응모는커녕 아직 완성도 못했다. 불성실한 탓이겠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타임리프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타임리프를 검색해보았다. 타임리프(Time Leap). 시간을 건너뛴다는 뜻으로 이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본 소설이자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있다. 그 영화라면 수 년 전에 한 번 보았다. 작년 여름에 도서관에서 틀어줬는데 자료실에 익숙한 피아노 멜로디가 들리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삽입돼 있었던 걸 수 년 전에는 몰랐다.


그 곡은 주인공 소녀가 처음으로 타임리프를 경험하는 순간에 흐른다. 모두가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학교. 텅 빈 교실. 칠판을 뒤덮은 늦은 오후의 자연광. 진중한 피아노 선율.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고 나는 한참 동안이나 이 음악이 왜 도서관에서 들리지? 했었다. 그런데 너무 잘 어울리잖아!

그 곡이 들렸을 때 도서관은 순간 비일상적인 곳으로 뒤바뀌었고, 뒤바뀌는 찰나의 틈으로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그 곡은 항상 그런 순간에 아주 잘 어울렸다. 사서함 37에서 언급했던, 결혼식 대관을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 곡을 떠올렸다. 아는 곡이 얼마 없는데 그 곡이 내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에 더없이 좋은 환기를 불러일으켜주니 다른 것을 더 알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타임리프의 ‘리프(leap)’는 ‘비약’이라는 뜻도 지닌다. ‘비약이 심하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할 때의 그 비약. 정상적이고 점진적인 흐름을 벗어나 엉뚱한 결론에 다다랐을 때 말하는 그것. 날아가듯 뛰어 오르거나 지위나 실력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높아진다는 사전적인 의미도 있지만 우리는 ‘자네 실력이 한 단계 비약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간의 비정상적이고 갑작스런 변주. 타임리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구상하고 끼적였던 그 소설은 타임리프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다. 타임리프 뿐인가. 타임워프, 타임루프, 타임슬립 등등 시간 여행에 대한 이해도 구분도 하나도 할 수 없으면서 단순히 소설공모전이라는 것에 혹해 덜컥 준비를 시작한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는 그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홀로 이상한 시간의 굴레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떠돌고 있는 중이다. 어쩌자고 시작했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끝날 기미조차 안 보인다. 소설을 완성하려면 어쨌거나 쓰고 있는 내가 어떤 확신과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확신과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더라도. 어쨌든.


시간에 대해서라면 앞으로도 완전히 이해할 날은 없을 것이다. 시간 여행.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좋아했던 음악을 듣거나 문장을 읽으면서 현실과 연결된 서버의 전원을 잠시 끄는 정도일 것이다. 지난여름 도서관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도입부가 아련하게 들려 왔을 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이건 정말 꿈 속 같잖아, 했을 때의 그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이 내가 가진 최첨단 장비의 타임머신으로 나에게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여행.


그 소설,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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