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9_am11:22
시댁과 친정 방문을 숙제처럼 모두 해치우고 남편과 함께 한남동을 지나는 중이었다. 영화 라라랜드 오프닝처럼 차덮개 위로 다같이 펄쩍 뛰어 올라 춤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체된 차량들을 바라보다, 우리 해방촌 들렀다 갈까? 내가 말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급했다. 가서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독립책방도 들르고. 계획은 그랬다.
해방촌 공영주차장으로 검색해서 달려갔다. 왜인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은데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평지가 아니라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해방촌은 이런 곳이구나. 좁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명절이라선지 주정차된 차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해방촌 공영주차장은 당연히 만차였다. 주차할 곳을 찾는 게 일이었다. 해방촌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주변에 주차해 놓은 차들은 많은데, 다들 비탈지고 가파른 곳에 위태위태하게 차를 세워두었다. 잘못해서 차 한 대가 구르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주르르르 미끄러질 태세였다. 그런 길을 나는 달렸다. 운전 초보가 운전 연습 제대로 한다는 핑계를 위안 삼으면서.
참다 참다 배가 터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견인지역’이라고 붙어 있지만 차 몇 대가 주차돼 있는 해방촌 입구 쪽에 차를 세웠다. 해방촌이 하나의 거대한 고가에 위치한 것처럼 옆으로 난간이 있었고 그 아래 평지에는 아파트가 단지가 있었다. 고가와 아파트 사이, 난간에 딱 붙여 세워서 해방촌 언덕 위를 오르는 다른 차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인지역’ 팻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른 화장실부터 가자, 그리고 금방 빼자.
카페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식사를 팔고 있는 식당이 대부분이었고, 유난히 눈에 보이는 손님은 외국인뿐이었다. 들어갈 수 없었다. 신흥만방과 여성 전용 사우나가 보였지만 둘 다 입구 앞에서 돌아섰다. 한참을 걸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팬케이크가 그려진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자 환하고 푸근하게 반겨주는 주인의 인상에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화장실 문이 보여서.
남편과 번갈아가며 화장실을 다녀오고, 거품을 듬뿍 올린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오고,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값진 한 시간이었다. 핸드폰으로 가보고 싶던 독립책방 위치를 검색했다. 걸어서 8분이었다. 다시 언덕을 올라야했지만 필요 없는 것은 비우고 필요한 것은 채운 가뿐한 몸상태였기 때문에 거뜬했다. 조금 전에는 차로 움직였던 좁고 위험한 길을 걸어서 가니 편했다. 그리고 찾았다.
안에는 두어 명의 손님이 이미 있었다. 나와 남편이 더 들어갔지만 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가운데 커다랗고 긴 매대용 책상이 한 개, 입구 쪽 통유리창에 닿은 작은 책상이 한 개 더. 벽에 서 있는 서가도 가급적 책의 등보다는 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책이 얇은데다가 등 제목이 없는 경우가 많은 독립출판물들이었다. 하나하나 꺼내서 넘겨보고 읽어 보아야만 진짜 가치를 알 수 있는 책들. 내가 사려던 책은 입구 쪽 통유리창에 닿은 작은 책상,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책방 주인은 뒤에 숨어 있었다. 커튼까지 치고. 안에서 무얼 하는지, 작업을 하는지, 안에 숨어 있을 자리는 충분한지 궁금했지만 꽤 괜찮은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책방의 단점은 주인의 눈에 내가 너무 잘 띄는 것이어서 마음 편히 책을 읽지도 고르지도 못한다는 점이었는데 여긴 마치 무인책방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 나는 내가 사려던 책을 옆구리에 끼고서 다른 책들을 찬찬히 보았다. 이게 다, 직접 만든 책들이었다.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일부러 찾지 않으면 영원히 볼 수 없는 기록들.
커튼 안으로 빠끔히 고개를 숙였다. 주인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이거 얼마예요?
육천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내려오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견인해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야간운전은 두 번째였다. 긴장한 채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일을 몇 번 반복하자 큰 길이 나왔다. 큰 길이 나온 것만으로 안심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모험을 좀 했는지 계기판에 주유하라는 표시가 계속 나타났다. 도시 고속도로 진입 직전에 주유소가 보여 기름을 잔뜩 넣었다. 양화대교와 합정을 지나 집까지 무사히 왔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좋은 여행이었다. 집에 와서 책을 펼쳤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오늘 벌였던 일들은 이 책을 볼 때마다 생각날지도 모른다. 처음 가본 해방촌과 작고 좁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 해방교회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 책에는 ISBN도 가격도 없었다. 『한 달의 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딱 한 달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작가 설명이라곤 이름뿐이었는데 이미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