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3_am01:35
귀경 열차 시간을 늦추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여독을 푸는 시간을 가늠하여 오후 한 시 반 KTX로 예매해둔 터였다. 오후 한 시가 가까워오자 좀 더 있다 가고 싶었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시던 커피와 읽던 책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검색해보니 다섯 시 사십오 분 차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밤 열 시는 되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이 걱정됐지만 서울에 일찍 도착한다고 그 걱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유! 시간보단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역방향뿐이야.”
남편의 말에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역방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멀미가 날 것 같은 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앉아서 가다니 얼마나 어지러울까. 순간 취소고 뭐고 그냥 원래대로 한 시 반 차를 타고 갈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게 가기로 마음을 기울인 상태였고,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이제는 더 이상 갈까 말까를 고민할 단계도 아니었다. 그냥 타기로 했다. 역방향.
원래 출발하기로 했던 한 시 반부터 실제로 출발한 다섯 시 사십오 분까지 뭐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카페가 있던 서면 롯데백화점 지하 풀바셋에서 마시던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맑고 따뜻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예쁜 파랑이었다. 햇빛이 적당히 비추고 있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그림자조차 따뜻해 보였다. 서면에서 가까운 부산시민공원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포켓몬이 많이 잡힌다고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알려준 적이 있었다. 공원 근처에서 이마트 트레이더스 간판을 먼저 발견하고는 그리로 들어갔다. 코너를 돌면서 엄청나게 대형으로 판매하고 있는 빵과 치즈와 초콜릿과 과자와 초밥과 치킨을 보며 “와, 사고 싶다.”를 연발했다. 처음 구경하는 거였다. 초밥 앞에서는 살까 말까를 일곱 번도 더 한 거 같다. “우리 서울에서 꼭 가보자. 차 몰고 가보자.” 다짐을 했다. 시민공원에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포켓몬이 덜 잡혔다고 했다. 그것들에 나는 별 관심이 없고 어플도 깔려 있지 않은데, 남편이 요즘 몰두해 있는 것이어서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는 나로선 남편의 놀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약간의 흐뭇함이 있었다. 하여 남편이 아이폰을 들고 공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난 혼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었다. 햇볕이 등을 비추고 있었다. 따뜻했다. 따뜻하다는 말을 이 문단에서만 네 번을 썼다. 하지만 정말 따뜻했는걸. 다섯 번.
다시 서면 시내로 돌아와 원래 먹기로 했던 농부핏자가 브레이크 타임인 관계로 근처 빵집에 들어가 딸기 생크림 오믈렛 스물네 개 세트를 한 상자 샀다.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 부산 여행에서 처음으로 기다리는 줄을 섰다. 이게 부산의 명물인가?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언가를 달랑거리며 들고 가기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빵집 바로 옆 식당에서 밥을 먹고 부산역으로 가려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서 전포동 카페 거리를 마주쳤다. 이왕 온 김에 둘러보기로 했다. 천천히 둘러봐도 될 정도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방금 지나온 곳, 서면의 번화가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색색의 외벽으로 장식한 카페들 자체가 조각 케익을 모아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지금까지의 부산이 큼직큼직한 대도시의 느낌이었다면 여긴 난쟁이 소굴처럼 모든 게 작아 보였다. 저 위로는 우리가 묵었던 토요코인 서면점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숙소 코앞에 있었네.”, “왜 이걸 몰랐을까.” 이런 대화를 나눴는데 왜 이걸 몰랐을까 하고 아쉬워했던 것은 작은 카페들보다는 근처 부전도서관 때문이었다. 한눈에 봐도 아주 오래된 건물 같았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지은 지 50년이 넘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역시 숙소 코앞에 있었다. 숙소 창문을 통해 조금만 눈여겨 봤어도 보였을 거다. 왜 이걸 몰랐을까. 월요일은 휴관일이라 안에는 들어가볼 수 없었다. 숙소 코앞이라 어제도, 그제도 갈 수 있었는데, 왜 이걸 몰랐을까, 하면서 도서관 앞을 지나갔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쾌적한 롯데 백화점 화장실을 마지막으로 들른 다음 부산역으로 갔다.
아침에 일어나 가방을 맨 채로 일만칠천 보나 걸었던 덕에 역방향 KTX에 타자마자 의자 등받이에 몸이 착 달라붙었다. 안락했다.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이미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었다. 열차가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창밖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천천히 부산역이 앞으로, 앞으로 사라졌다. 부산의 모든 풍경과 사물을 천천히 앞으로 보내는 시간이었다. 아니, 보내는 건 그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보내주고 있었다. 나른해진 몸과 시선 때문이었는지, 짧은 여행의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아쉬운 배웅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처음이었다.
다음에는 어떤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배웅 받을 때의 기분은 또 어떨까. 처음으로 역방향 열차가 불편하거나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산역을 완전히 벗어날 때쯤부터 눈이 감겼다. 아주 편안하고 단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