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구구절절

21. 기억

20170410_am02:00

by 강민선

한도서관 한 책 읽기 예술주제 추천도서를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에 읽었던 안규철의 산문집 『그 남자의 가방』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다. 짧은 산문 모음집이라 과자선물세트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먹는 것처럼 골라 읽었는데, 지금 와서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안에 수록된 「손안의 세계」뿐이다. 이 산문은 그냥도 읽고, 소리 내서도 읽고, 혼자 녹음한 적도 여러 번 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손에서 입 사이의 거리는 한껏 벌려보아야 1미터도 채 안 된다. 그러나 그 1미터야말로 인간의 운명에서 결정적인 공간이다.”라고 운을 띄우는 이 글이 유독 더 기억나는 것은 이 책을 내게 추천해준 사람이 친히 골라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저 말은 인상적이었다. 입과 손 사이의 거리가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말. 팔을 쭉 벌려 길이를 가늠하기도 했다. 왕십리의 지하 아지트 같은 작은 카페였고 나는 백수였다. 그때 그곳에서 이 글을 소리 내 읽으며 녹음을 했다. 처음에는 웃겨서 몇 번인가 중단됐다가, 웃는 소리, 카페의 소음도 같이 녹음됐다가, 읽을수록 점점 빠져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럴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꿈이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득하기도 하다. 그땐 몰랐겠지. 훗날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다음까지 그날을 기억하게 될 줄은. 사실 잊고 있었다. 책을 보다 불쑥 떠오른 것이다. 역시 남는 것은 책뿐이고, 정말 좋은 책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마저도 빛이 나는 걸까. “혹사당하면서 손을 길들인 대가로, 우리는 비로소 손에서 입 사이에 그만큼의 여백을 얻을 수 있다. 쓸모 있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태어난 그대로의 손이 아니라 남들에 의해 만들어진 손, 기계가 되어 개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손, 그것이 우리들의 손이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도 손이 하는 거다. 걷거나 자거나 멍 때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그렇다. 손이 없으면 도서관 업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평소의 그 잡다한 생각을 정리할 수도,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 수도 없다. 우선은 내 정체성과 관련된 것들을 나열해 보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일상적인 것들을 못하게 되는 건 당연할 터. 그런 내 손을 들여다본다. 못생기고 텅 빈 손. 한때는 두 손 가득 쥐었지만, 자주 놓쳐 망연자실해졌던 나의 손.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것도 머리가 아니라 이 손이 아닐까 싶어진다. 손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미술가가 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시작할 일은, 그러므로 그런 손들을 가지고 다시 남들이 정해놓은 데생의 방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계손으로부터 손금처럼 태어날 때부터 쥐고 나온 원래 자기 손의 필적을 되찾는 일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손을 제도와 관습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지금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는 오늘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이 손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그날까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쥐었다가 놓칠까. 지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많은 것을 쥐기보다는 내가 쥐었던 무언가를 놓쳤을 때 너무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기를. 이왕이면 내가 쥐고 싶은 그것이 손이 아닌 마음에 오래 담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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