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1_am01:53
도서관 뒤쪽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숲속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추진해보라는 업무가 주어졌다. 지난 2월 초였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백지 위에다 소설 한 편을 써 내라는 말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어쩌면 소설을 쓰는 게 훨씬 쉬울지도 몰랐다.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설득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현실 공간을 만드는 일도 아니니까. (그런 각오와 마음가짐으로 소설을 썼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지시가 떨어지고 두 달 동안 숲속을 총 네 번 올라가보았다. 점심 시간동안 잠깐, 혹은 근무 시간 동안 잠깐씩 짬을 내 다니면서 길부터 파악했다. 그리고 휴관일이었던 오늘 다섯 번째로 올라가보았다. 휴관일이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여유를 갖고 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지도도 완성해 나갔다. 구청에는 공원녹지과라는 부서가 있고 담당 공무원이 있는데 이걸 왜 도서관 사서가 하는 거지? 이걸 왜 내가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매번 똑같은 일, 정해진 업무만 하는 것보단 이 기회에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숲길이 꽤 괜찮았다. 날씨도 좋아서 하늘이 파랬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고요한 소음이었다. 나는 계속 걸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다 걷고 있었다. 아, 이곳은 머물기보다는 지나가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가는 곳. 걸으면서 생각하는 곳. 이곳의 이름을 ‘생각숲길’이라고 해야겠다! 라고 결정했다. (‘생각’의 ㅅ과 ㄱ, ‘숲길’의 ㅅ과 ㄱ이 짝을 이루는 게 특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길의 이름도 하나씩 짓기 시작했다. 도서관 정문을 지나 언덕꼭대기까지 오르는 나무 계단은 ‘철학자의 길’, 언덕꼭대기에서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기준으로 왼쪽은 ‘시인의 길’, 오른쪽으로 길고 좁게 오르락내리락 이어진 길은 ‘소설가의 길’이다. ‘소설가의 길’과 나란하게 뻗은 좀 더 작은 오솔길은 ‘음악가의 길’, 거기서 다시 아래로 뻗어 주거지역과 이어지는 길은 ‘화가의 길’이다. 오늘 내가 걸은 이 길 위에는 이름을 단 이정표가 세워질 것이고, 그 이름에 걸맞은 인물과 작품들을 소개한 안내문도 세워질 것이다. 작은 새집처럼 생긴 꼬마 도서관을 지어 소량의 책을 넣어두고, 지나가는 사람들끼리 교환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애초부터 가장 큰 걱정은 사람들이 책을 그냥 가져가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는데, 24시간 지키고 서 있지 않은 이상 그걸 막을 방법이 없으니 책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공공의 윤리를 우선하는 방향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길의 이름 따위, 책 따위 바라지 않을지도 몰라.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서둘러 가는 지름길인데 생각은 무슨 생각! 하며 차갑게 외면할지도. 그렇다고 해도…… 공상이야 평소에도 잘 하는 짓이고, 소설 쓴답시고 집을 지었다 허물기를 무수히도 반복해보았으니 오늘까지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된다 해도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다리가 조금 아프고 눈이 자꾸만 감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