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구구절절

28. 청취

20170419_am01:32

by 강민선

내친 김에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2004년 1월 7일 자 방송을 팟캐스트로 듣고 있다. 시간 여행이 따로 없다. 같은 해 8월 4일 이후로는 세상에 없는 목소리가 될 거란 걸 전혀 모르는 아나운서는 8년 만에 다시 만난 정성일 평론가와 그 아름답고 우아한 목소리로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만연체의 문장투로 정성일은 정은임에게 말한다. 19세기에 헤어진 우리가 20세기에 다시 만났다고. 라캉의 비유까지 빌려온다.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정성일의 능란한 언변을 듣고 있자니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8년 만에 다시 만나 이 길고 깊은 만연체의 문장투로 영화를 향한 건지 정은임을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구애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정성일이 고작 8개월 뒤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슬펐을까. 19세기에 만나 20세기에 헤어졌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리고는 그의 어법처럼 길고 긴 사유 끝에 이내 받아들였을 것이다.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그 목적지가 반드시 이곳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2017년 4월 19일 새벽 한 시가 지나간다. 14년 4개월 전에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고 무엇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까.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다 잊어버린 채 그럭저럭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으로 나는 도착해 있다. 잠을 쫓으며 이런 글이나 쓰고, 십 년도 더 된 라디오 방송이나 다시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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