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9_am12:15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어떤 장르의 영화를 선호한다기보다는, 그냥 영화를 진지한 대상으로 생각했던 한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라고 해둬야겠다.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 기억이 뚝 끊긴 느낌이다. 그때 이후로도 영화는 꾸준히 봤고 극장에도 잘 갔지만,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손꼽아 기다린다거나, 영화 잡지를 사기 위해 서점에 간다거나, 영화 관련 스크랩을 하진 않았다. 심야 라디오 방송도 그 즈음부터 드문드문 듣다가 뚝 끊었다. 2004년 8월에 우연히 FM 영화음악을 다시 듣게 되었다. 정확하게 기억한다. 8월 4일이었다. DJ가 오프닝 도중에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정은임 아나운서의 부고를 전했다. 그날이었다. 정말 우연히, 밤에 잠이 안 와서 실로 오랜만에 틀어 놓은 라디오 방송에서 한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들었던 프로그램이 다른 DJ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DJ가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 참 많이 울었다. 정말 슬퍼했다. 그 슬픔이 작은 라디오를 통해 내 방 구석구석에 전해졌다. 새벽 한 시였고,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영화를 막 좋아하기 시작했던 열여섯에 나는 FM 주파수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누가 알려줬을까? 그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모아두었던 잡지들은? 나의 리버피닉스 브로마이드는? 온갖 것들이 생각나면서 너무나 늙고 변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한탄과 함께,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돌아갈 수 없는 내 과거를 까마득히 지켜보기만 했던 밤이었다. 내 앞에 어떤 새로운 슬픔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타인의 울음소리만 망연히 듣고 있던 밤이었다. 그 방이 생각난다. 그 작은 방에서 울고 웃었던 시간들과 각각의 사정들이 떠오른다. 그저 이 글을 쓰기 위해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될 시간을 나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늙고 변할 수 있는지를. 아마도 그날의 기억이 마지막인 듯하다. 영화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도, 하고 싶은 말도, 그날이 마지막이다. 똑같은 경험,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영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시사회 정보 같은 건 찾아보지 않는다. 좋아하는 배우도, 감독도 없다. 인기 있는 영화평론가의 별점으로 영화를 볼지 말지를 결정하고 웬만한 것은 집에서 배달 음식 먹으면서 본다. 그리고 이제는, 잊고 있던 과거의 한 부분을 통째로 열어 내 정체를 밝혀줄 만한 존재, 내 우상의 죽음 같은 건 기다리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