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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y 21. 2020

워킹맘 남편의 자격

누군가 글씨를 쓰려면, 누군가는 떡을 썰어야 한다.  

나의 어린 시절,  평소에도 깔끔한 성격이신 아버지는 늘 퇴근하실 때마다 세 딸들이 정신없이 놀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집이 돼지우리 같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사뭇 이해가 됐다. 정리를 한다고 해 놓아도 한두 시간이 안돼서 아이들이 잠깐 놀고 지나가면 그곳은 엉망진창이 된다. 뚜껑 열린 사인펜에, 가위로 자른 색종이에, 책은 널브러져 있고, 먹다 남은 간식까지.. 아이들과 직접 함께 그곳에서 놀았다면 그나마 거부감이 덜할 텐데 잘 정리된 사무실과 같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늦은 퇴근과 함께 날아온 아버지는 매일매일이 충격이었으리라.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전업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워킹맘이 가사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퇴근 이후의 시간이라고 해봤자 저녁식사와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2시간도 채 안 되는 약간의 시간인데, 그나마 이 시간조차도 아이들과 조금 놀다 보면 후딱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주말이 남지만, 각종 가족모임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어딘가 다녀오고 나면 주말도 그야말로 순삭(?)이다. 따라서 가사의 매우 효율적인 운영이 필요하며, 나의 동반자! 구세주! 남편의 역할이 심히 중요하다.


남편의 존재는 사실 매우 소중하다. 결혼이라는 관계에 의거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가사든 육아든 무보수로 분담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독점적으로 애정을 주는 대가로 그대는 나와 인생을 함께하기로 하였으니, 남편에게는 결혼으로 발생하는 가사의 의무던 육아의 의무던 함께 분담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나는 그러한 의무의 이행을 청구할 권한이 있다. 물론 가사 또는 육아 분담 의무이행을 청구하기 전에 알아서 착착착해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혹시 가끔 잊고 있다면 리마인드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이쯤에서 워킹맘의 남편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격을 몇 가지 생각해보게 된다.


가장 기본적으로, 아내의 일에 대한 존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체적으로 아직까지는 유사한 직장경력의 남녀를 비교했을 때 남자들의 보수가 조금 더 높다 보니, 아내의 일을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본인의 업무보다 덜 중한 것으로 여기는 남자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노동에는 종류가 다를 뿐 귀천이 없다. 어떠한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옴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아내의 일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내의 연봉이 남편의 연봉을 훌쩍 뛰어넘게 되는 날이 있을 줄 또 누가 알겠는가.


둘째는, 언제든 가사를 분담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능력이 필요하다. 언제든 가사를 분담하겠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던가, 할 수 있더라도 남자가 어디 주방에 들어가냐는 식의 태도는 좀 곤란하다. 축구를 할 때 공격수와 수비수가 나누어져 있지만, 상대팀 선수가 코너킥을 찰 때는 모두 들어와서 공을 막아야 하는 것처럼 대략적인 가사분담의 사전 합의가 있다 하더라도, 아내가 야근을 하거나 출장을 가면 구첩반상까지는 아니어도 간단한 볶음밥 정도는 해서 본인도 먹고 아이들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민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저것 시부모님이 다 해줘서 완벽하게 자란 남자분은 좀 곤란하다. 입주 가사 전용 도우미를 쓸게 아니라면 아이가 있는 집이 늘 사무실처럼 잘 정리되어 있을 수는 없다. 집이 좀 어질러져도 견딜 수 있고, 링클 프리 셔츠를 입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주말에 한 끼 정도는 밖에서 사 먹을 수도 있는 너그러운(?) 마음씨가 필요하다. 


워킹맘이 아닌 삶을 생각해본적이 없는 내가 남편에게 신혼초부터 강력한 요구한 것이 있는데, 바로 "배우자가 가사 일할 때 놀지 말기"이다. 예를 들면 내가 요리를 하면 남편은 같은 시간에 집안을 정리하고, 남편이 설거지를 할 때 나는 빨래를 너는 식이다(물론 그 시간에 아이들을 돌볼 수도 있다). 그렇게 동일한 시간에 가사와 육아를 함께 척척 처리하면, 일을 보다 일찍 마무리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쉴 수 있다. 나아가 나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왜 너는 놀고 있는가'라는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내가 아직 크게 성내지 않고 워킹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방식은 괜찮게 작동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말도 예쁘게 하고 노래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면 좋겠지만 참고만 하시길. 내 선택은 이미 끝났다. 이번 생은 오늘 저녁 퇴근 후에 집에서 아이들을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 남자와 함께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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