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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Jul 21. 2020

너의 롤모델이 되어줄게

지극히 이기적인 엄마의 변(辯)

어제도 미안한 하루가 이어졌다. 일의 양이 많아도 웬만하면 정시에 퇴근하고 아이들이 잠든 뒤 일을 마무리하는데, 어제는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회의가 조금 늦어졌고, 회의록을 정리하여 송부하고, 이것저것 처리하다 보니 평소보다 퇴근이 1-2시간 늦어지게 되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밤새 야근을 한 것도 아닌데, 퇴근 1-2시간 늦은 것 가지고 생색이냐고 할 법하지만, 아이들은 취침시간에 맞추어 잠들기 때문에 그 시간을 넘어서 퇴근하게 되면 그날 하루는 꼬박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니, 엄마로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퇴근하고 보니 운 좋게도 아이들은 잠들어 있지 않았고, 늦은 식사하는 엄마를 졸린 눈을 비비면서 바라보았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눕히고 책을 읽어주려는데,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큰 딸과, 조금이라도 엄마와 어울리고 싶은 둘째 딸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보다 현명한(?) 둘째가 아빠에게 가면서 사건은 일단락이 났지만, 나의 퇴근이 늦으면 늦을수록,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날일수록 아이들의 엄마에 대한 갈증은 커지는 것 같다.


이런 날이면 나도 여느 워킹맘처럼 "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면 더 나을까"하는 고민에 빠진다. 아이들은 엄마를 원껏 볼 수 있으니 마음의 안정을 얻을 것이고, 바쁜 아내 때문에 본인도 바쁜 와중에 집안일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는 남편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과 남편의 삶의 만족도는 올라갈 수 있겠지만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지극히 이기적인 엄마인 나는 현재 나의 행복을 접어두고 현재의 아이들과 남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보다,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내 기준에서 "더  멋진 일"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장차 나아가야 할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고 멋지게 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 아이들이 커서 닮고 싶은 롤모델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어느 날 임원회의에 들어가 회의를 하다 눈을 들어보니 나는 어느새 모두 양복을 입은 남자 임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누구 하나 내가 여자라고 머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의 옷차림, 나의 목소리, 나의 말투 모든 것이 생경스럽기만 그 상황에서 딱히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주변을 돌아보니, 건설업계 특성상 역시 '워킹맘 선배'를 찾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소수의 여자 선배들은 미혼이었고, 회사 내 대다수의 여자 직원들은 나의 후배들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회사에 언제까지 남아있을까, 오래 있는다 한들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례", "모델사례"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힘을 준다. 소송을 할 때도 유사 사건에서 나의 청구와 유사한 청구가 받아들여진 선례가 있으면 보다 자신 있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스포츠에 있어서도 박세리 키즈, 김연아 키즈와 같이 훌륭한 선수가 한번 나오면, 그 선수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많은 후배들이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 심지어 라이트 형제도 하늘을 나는 새라는 훌륭한 "모델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라는 어마어마한 발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는가.


반면,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가지도 않은 길이 정비되어 있을 리 만무하니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고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계속해서 옆길로 돌아다닌다.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기성세대에게 워킹맘이니 정시 퇴근하겠지만 동시에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 되겠다고 하면 어이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유능한 직원이 되려면 잔업도 많이 하고 윗분들이랑 많이 어울리고 해야지, 칼퇴를 외치면서 어떻게 회사의 사정을 두루두루 살피며, 보다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몰라서 그러는 것에 불과하다. 그분들은 일을 하겠다면 아이는 누가 키우는지, 아이를 직접 돌본다고 있다고 돈은 누가 버는지를 궁금해하겠지만, 다행히도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업무를 볼 수 있는 여러 기술환경이 제공되고, 어린이집, 유치원 등 다양한 돌봄 서비스 덕분에 우리는 하이브리드가 가능한 시대를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을 마치 두 마리 토끼에 비유하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우리 사회도 아직까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서 어깨에 메고 가고 있는 여성들을 많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너무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닐까(사실 나는 남자들도 잃어버린 "가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가정"에서 친밀감을 나누고 즐거운 추억을 쌓을 권리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딸을 둘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일을 하는 것 자체도 너무 즐겁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정생활도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둘 중에 그 어느 것도 포기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두 딸아이가 다 커서 아이를 낳고 언제 회사에 복귀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거나, 직급이 올라가면서 회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길 때, 내가 이미 경험한,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무수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당당히 말해주고 싶다. 어여쁜 두 딸을 키우면서 회사생활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고, 회사에서 얻은 여러 경험과 보수로 아이들을 보다 풍요롭게 키울 수 있었다고.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들의 꿈을 찾아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얻은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축하하고 격려하며, 너희들 딸과 아들들에게 일과 가정을 모두 사랑하는 방법을 고스란히 물려주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삶을 아이들이 원할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굳이 왜 그런 쓸데없이 고된 길을 가시냐며 조소를 보낼 수도 있다. 그때에는 아마 지극히 욕심 많은 이기적인 엄마가, 너희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랬으며, 혹 반드시 너희가 아니더라도 많은 능력 있는 여성들이 엄마가 되고 싶을 때, 아니면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엄마들이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을 때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를 남기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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