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킹맘 Jul 23. 2020

Imagination, Patience, Humor

국영수보다 중요한 나만의 조기교육 리스트

아이가 크면서 여러 사람들이 물어왔다. 아이가 한글을 뗐는지, 영어유치원에 다니는지, 조금이라도 아이들의 학습에 관심이 있는 엄마라면 또래의 주변 아이들이 '진도'를 얼마나 나갔는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변 아이들의 진도에 맞추어 우리 아이도 뒤처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우리 아이는 아직 한글을 못 읽는다. 6살이 되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글을 못 읽는 것도 이상하고, 덩달아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한글을 떼다 보니, 아이들을 가까이서 관찰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살짝은 조바심이 생기셨다. 심지어 어젠 티브이 서랍장에서 몰래 숨겨져 있는 한글 학습책을 발견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글을 일찍 배우는 게 나쁠 리 없다. 아이들의 학습 관련된 여러 책이나 프로그램을 보면 한글을 빨리 떼면 다양한 책을 스스로 읽을 수 있고, 여러 책들을 통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한글을 떼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근데 나는 자꾸 머뭇거린다. 아이가 글자를 통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방식이 너무 예뻐서 한동안 그냥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뭘 보는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우리 딸은 한글도 모르면서 하루에도 몇 권씩 앉아서 책을 본다. 그리고 충분히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한다. 어쩌면 저렇게 책을 많이 보면 언젠가 한글을 저절로 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안일한 마음도 든다. 나는 그냥 게으른 엄마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은 걸까'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다. 한글이나 숫자는 유치원에서 배우고, 영어는 아마 학교에서 가르쳐주겠지. 여자아이지만 체력증진을 위해서 종목 구분 없이 운동 한 가지는 했으면 좋겠고, 음악도 즐길 줄 아는 것도 좋겠지만, 예체능은 어디까지나 옵션이다. 가르치려고 덤비면 덤빌수록 악 효과만 날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접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뿐이다. 이것저것 고민하다 우리 딸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주고 싶은 게 몇 가지 떠올랐는데, 바로 "Imagination(상상력), Patience(인내), Humor(유머)" 이렇게 3가지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 었다. 장래희망만 해도 수십 번이 바뀌었고, 당시 접하는 책이나 드라마에 따라 내 머릿속 안에서 나는 동화 속 공주님이기도 했고, 대학교에 다니는 멋진 언니가 되기도 했다. 빨간 머리 앤에 빠졌을 때는 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살고 있었고,  올림픽 기간에는 나는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운동선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낱 쓸데없는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상상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어린 시절의 상상력은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꿈꾸어볼 수 있게 해 주면서 장래의 인생을 계획하는데 상당히 유용한 시뮬레이션 도구였기 때문이다. 나를 현재 속의 나로 단정 짓는 대신, 끝없이 자유롭게 상상하며 미래의 다양한 나의 상황 또는 현재의 다양한 사람들의 상황 속에 대입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꿈을 가진다는 것은, 달리기로 치면 고작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했다. 꿈이 생긴 나는 앞으로 달려야만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나의 경우 꿈을 이루는 과정은 시작부터 중간까지 가는데 100의 힘이 들었다면, 중간부터 결승지점까지 도달하는 데는 200의 힘이 들었다. 처음에는 금방이라도 결승점이 보일 것 같은 마음으로, 신나게 달려가지만 가다 보면 목도 마르고 다리도 후들거리고, 무엇보다 이 길이 맞을까라는 내 안의 불확신이 나를 뒤흔들었다.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는 내가 나 스스로와 싸워야 했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였다. 내가 세운 목표를 믿고, 신체적인 어려움과 정신적인 어려움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견뎌내는 힘.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 같은 인내가 없이는 그 어떤 꿈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나는 너무 '빡센'엄마였다. 6세와 4세 아이에게 인내를 가르치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는 인내의 고단함을 조금은 완화시켜주는 일종의 마취제를 알고 있었다. 낯설었던 해외 체류기간에도, 퍽 길었던 고시공부 기간 동안에도 나는 유머에 의지했다. 살다 보면 고단한 순간도 좋은 사람들과 크게 한번 웃고 나면 버틸 수 있었다. 나에게 유머는 일부러 코미디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것보다는,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그저 흘러가게 두는 여유를 두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가족끼리 여행을 는데 일대 방이 모두 만실이라 방을 못 구하고, 밤새도록 호텔을 찾다 결국 차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 처했을 때, 머 이런 일이 다 있나 어이가 없어 크게 웃으셨던 부모님의 웃음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갈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유머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상상력이 무엇인지, 왜 인내가 필요한지, 유머는 어떻게 즐기는지 이런 것들은 노트에 정리해서 설명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학원이라도 있다면 보내고,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사주고 싶지만 그렇게도 안되니 약간은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나름 내 선에서 어떻게든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어차피 하루 이틀 만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한 20년 정도를 꾸준히 가르치고자 한다. 상상력은 호기심과 양면의 동전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어떤 느낌인지 많이 물어봐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인내심은 아직 아이에게 가르치기 조금 어렵다고 느끼지만, 모든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자 한다. 셋 중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사실 유머다. 엄마 아빠가 함께 많이 웃는 모습을 보여주면 될 것 같은데, 나 스스로 내 삶을 내려놓고 항상 웃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결국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까지 인생 수양을 쌓게 되니 아주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롤모델이 되어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