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킹맘 Jul 06. 2020

엄마의 원죄

미처 몰랐던 '엄마'라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엄마라서 억울한 적이 있는가. 21세기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며 나는 문화 시민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엄마'가 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직접 듣고 전해 듣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쌓여 사뭇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엄마는 죄인이 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아기가 조금 예민하거나, 밥을 잘 안 먹거나 하면 그 화살은 쉽사리 엄마한테 돌아온다. 태교를 못했다는 비난과 함께 말이다. 둘째의 경우 나는 아이를 낳기 전날까지 일을 했고, 먹는 것도 편하게 먹고, 만삭이 되어서도 첫째를 배 위에 얹어 안으며 매우 즐거운 임신 시절을 보냈는데, 이 모든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둘째가 아프거나 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잠시 보채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면, 내가 임신했을 때 너무 무리해서 그런다는 둥, 커피를 마셔서 그렇다는 둥 전혀 예상치 않은 화살이 나에게 돌아오곤 했다.


아이가 조금 커서는 어떠한가. 말이 늦으면 엄마가 말을 많이 걸어주지 않은 탓, 기저귀를 늦게떼면 엄마가 아이를 챙겨주지 않은 탓, 옷이 더러워지면 엄마가 위생관념이 없는 탓, 키가 작으면 엄마가 음식을 골고루 잘 챙겨 먹이지 않은 탓까지 아주 엄마가 두루두루 동네 북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학습 궤도에 올라서도 이 '탓'은 역시나 범위를 확장할 뿐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온다. 엄마가 아이에게 관심을 좀 더 가지면, 엄마가 유명 학습지를 끊어주면, 좋은 학원에 보내고 선생님을 붙여주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모든 학습 관련 마케팅은 엄마들을 타깃으로 하며,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는 바로 학교에, 집안 어른들께 죄인 취급을 받는다.


엄마 탓의 가히 최고봉은 엄마가 박복하여 딸을 낳았다는 누명이 아닐까. 딸이 시대적으로 아들들에 비해 귀함 받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음은 머 그렇다 치더라도, 딸을 낳았다는 게 어떻게 엄마의 잘못일 수 있을까. 아이의 성별이야 과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컨트롤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고, 굳이 잘잘못을 따지다면 Y염색체 대신 X염색체를 담은 정자를 더 튼튼하게 키워 보낸 아빠의 잘못이어야 하는데, 여자이고 약자라는 점을 빌미로 그걸 또 엄마 탓을 한 것은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나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을 뿐이고,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또는 두 번째라 여기저기 물어보며 두들기며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왜 무슨 일만 생기면 다 내 탓인 걸까. 나는 좀 억울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마음에 품고는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나의 육아를 지켜보며 응원해주는 많은 가족과 친구들과도 멀쩡히 지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매번 싸움닭같이 '그게 왜 내 책임인 겁니까'하고 싸울 수도 없는데, 어떻게든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그러다 나와 같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바로 '왕'이다. 현 체재하의 대통령과는 사뭇 역할도 느낌도 다른, 알에서 태어나고, 하늘님의 아들이며 수도 어디엔가 커다란 왕궁을 지어 살지만 막상 나는 그분이 뭐하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그 옛날의 왕 말이다. 옛날의 왕은 외적이 쳐들어와도, 그 해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도, 전염병이 돌아도, 심지어 비가 오지 않아도 다 왕의 책임이었다. 왕은 이 모든 일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책임을 졌고, 때로는 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왕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왠지 그리 억울한 느낌이 아니다. 아마도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왕은 그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권력을 쥐어잡은 이상 왕은 튼튼한 군대를 만들 수도, 미리 식량을 저장할 수도, 마을을 봉쇄하고 방역을 지원할 수도 있었다. 물론 비를 내리는 것 같이 백성들의 무지로 인한 오해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매번 왕의 능력에 따라, 그의 선한 의지에 따라 나라는 평온하기도 하고 매우 혼란스럽기도 했다.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그 일이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 때 그 성은에 국민들은 망극했고, 의지했고, 기대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했던 왕들은 백성들의 삶을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쉽사리 엄마에게 비난을 돌린다는 것의 의미는, 아마도 사람들이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가 '왕'이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엄마는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아이를 둘러싼 그 누구보다도 '왕'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아이는 '엄마'하고 울고, 주변 사람들 역시 엄마를 찾는다. 아이는 엄마품에서 안정을 느끼며, 아이를 가장 잘 훈육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결국엔 엄마다. 엄마의 이런 아이에 대한 무소불위의 영향력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쉽사리 엄마 탓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라는 자리는 매우 매력적이기도 하다. 나만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있고, 나는 어른으로써 이 아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물론 아이 본연의 모습까지 바꿀 수는 없겠지만,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어주고, 세상의 메시지를 모아주는 귀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엄마는 아이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다. 


한편 왕은 왕이기 때문에 절대권력 부여받고 끝없는 충성을 받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잘못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 돌렸다 하더라도 딱히 억울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이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엄마에게 절대권력과 끝없는 충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를 돌보기에 충분한 재량과 존중을 보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혹 남편으로써, 조부모로서, 기타 아이의 주변인으로써 끝없이 잔소리하고 엄마가 하고자 하는 아이의 돌봄이나 교육 또는 훈육에 간섭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 결과에 대해서 온전히 엄마에게 탓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엄마만의 육아가 아닌 이상 함께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엄마를 비난하기에 앞서, 엄마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자라듯, 엄마로서의 나도 자란다. 큰아이가 만 5돌이 다되어가는 지금 나의 '엄마력'은 아이를 갓 가슴에 얹었을 때의 '엄마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다. 나는 아이가 울어도 견딜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배고픔이나 졸음을 극복하고 아이를 돌보게 되었으며, 아이와 투닥투닥하면서도 하하하 웃으며 주말을 상쾌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의 엄마력 또한 앞으로도 점점 더 상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직 주말에 들었던 아이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즐거운 월요일 아침, 나는 오늘도 무지한 '백성'들의 불평은 잠시 뒤고 하고, 오로지 아이의 평안한 삶을 위해 고민하고 살피는 '엄마'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너희들이 잠든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