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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y 27. 2020

엄마는 바람둥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토록 치열한 삼각관계라니..

"갈등되네, 난 방황하는 남자

갈등되네, 사랑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날 사랑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내 사랑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야 하나~"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 담 드 파리'에 나오는 괴로워(Dechire)라는 노래의 한 소절이다. Dechire는 프랑스어로 찢다, 찢어진 등의 의미로 뮤지컬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중 하나가 오랜 약혼녀를 버리고 치명적인 매력의 팜므파탈인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와 사랑에 빠지면서, 당당하게 나는 두 여자를 사랑하고, 두 여자로부터 사랑을 받다 보니 갈기갈기 찢겨서 괴롭다는 다소 뻔뻔한(?) 내용의 노래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노래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의 BGM이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감사하게도 두 딸들은 나를 너무 사랑한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나오기도 하고, 둘 다 안아달라고 하기도 하고, 둘 다 양쪽에서 재잘재잘하고 싶은 말을 하면 나는 정말 머리가 아프다. 이쪽을 봐도 예쁘고, 저쪽을 봐도 예쁘고. 이쪽도 안아주고 싶고, 저쪽도 안아주고 싶고. 나는 육아를 하면서 줄곧 연애에 비교하곤 하는데, 예전에 한창 연애하던 시기에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던 삼각관계를 내 인생에서 아이 둘을 낳은 맞닥뜨려 이토록 치열한 고민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내가 하는 말들은 어떤가. "엄마는 너희 둘 다 사랑해", "자 한 번씩 안아줄 거야" 등 연애하는 관계였다면 상상도 못 할 재수 없는 말을 마구 뱉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큰 아이를 낳고 내가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 아이를 통해 이토록 나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머리도 못 감고 화장실에 못 갈 정도로 늘 나에게 안겨있고 싶어 하고, 밥도 떠줘야만 먹고, 책도 읽어줘야 하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울음을 터뜨리는 이 아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다. 그런데 똑같이 사랑하는 아이를 하나 더 낳고 보니, 드라마에서나 봤던 바람둥이들의 심정과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줄줄 따라다니는 여자들의 고충(?)이 십분 이해가 됐다. 사랑하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퍽 힘든 일이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 같다. 엄마의 사랑을 너무 미화시킨달까. 보다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열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 조금 더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데, 그게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한다. 큰아이가 떼 부리고 있을 때 둘째가 슬슬 와서 눈치 보고 엄마 옆에 착 달라붙으면, 둘째가 더 예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둘째가 용변을 보고 기저귀를 안 갈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큰 아이가 기저귀를 가져다주며 동생에게 기저귀 교체를 권유하면 첫째가 더 예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엄마도 사람이다 보니 아이가 예쁜 짓을 할 때 예쁘고 미운 짓을 할 때 덜 예쁘다(미운 짓을 할 때도 차마 안 예쁘다고 말하긴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두 여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오래전 중동에 출장을 갔을 때 그곳의 일부다처제 문화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다처(多妻)"를 모두 부양할 수 있는 남자들만이 일부다처를 하고, 원칙적으로 모든 아내들에게 동일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살다 보면 그중에 특별히 아끼는 아내가 있을 수 있으나, 선물을 하려면 모든 부인들에게 다 선물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혼돈 속에서 평화를 찾기 위한 일종의 타협점인 걸까.


물론 나는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지만, 두 아이의 애정공세로 괴로웠던 어느 순간에 불현듯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아이를 동등하게 평등하게 대해주는 방법뿐이라는 것이었다. 둘째도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 아기라고 늘 안고 있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도 언니와 똑같이 하고 싶어 하니, 큰 아이와 둘째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을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퇴근해서도 둘 다 똑같이 한 번씩 꼭 안아주고, 밥 먹을 때도 가끔 먹여달라고 투정을 부리면 둘을 앞에 앉혀놓고 똑같이 한입씩 주는 것이다. 큰 아이는 더 컸으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지만, 스스로 하고자 할 때는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더라도, 엄마의 사랑을 갈구할 때는 둘째와 똑같이 안아도 주고 업어도 준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를 둘 낳은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나도 다자녀가정에서 자랐고, 늘 나에게 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외출하셔도 항상 함께할 언니, 동생이 있었고, 함께한 세월만큼 두둑해진 우정이 나의 힘든 육아생활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아이들에게 서로 좋은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실제로 코로나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던 시기에도, 두 자매는 서로를 친구 삼아 집에서 정신없이 놀곤 했다. 


그런 이유로 나의 이런 바람둥이 생활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고, 나는 계속 뻔뻔하게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는 너희 둘 다 똑같이 너무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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