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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y 26. 2020

가정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육아를 위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줄곧 대기업에서 일했던 나는 경영진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장님이 앉아서 놀기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목격해온 경영진은 직원들이 모아서 분석해놓은 자료와 의사결정(안)들을 받아보고 칼로 대나무를 베듯이 착착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안고 있었다. 적기에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바로 손실로 이어졌고, 온 회사가 고통을 함께 겪어야 했다.


큰 아이를 임신을 하면서부터 나는 어렴풋이 경영진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흉내를 내야만 했다. 내 눈앞에서 결정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디서 낳을지, 조리원을 갈지 말지, 아기 용품은 언제 어떤 걸 살지 등을 결정해야 하는데 따로 자료를 정리해 줄 사람도 없는 나는 이것저것 정보를 취합하느라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집 생일파티 선물은 무엇을 살지, 아이 예방접종은 언제 갈지 지금도 하루에 쉴 새 없이 의사결정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이런 즉각적인 것들은 어떻게든 해결을 한다지만, 당장 아이를 낳았을 때 얼마나 쉴지 그리고 복직을 하면 누구한테 아이를 맡길지와 같은 중대한 결정들은 나를 꽤 오랜 시간 고민하게 했다.


당시 내가 내린 결정은, 임신 일주일 전에 친정이 있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가고, 친정부모님에게 큰 아이를 맡기는 것이었다. 참고로 미리 말하자면 우리 친정부모님은 세상 쿨한 부모님이시고, 운동이며 교회며 바깥활동도 많으셔서 손주 육아에 최적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육아에 대한 의견을 서로 잘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과(나는 도움을 받을지언정 전적으로 일임은 잘못하는 성격이다;;), 부모님은 나를 키우셨으니 적어도 내가 편하게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점, 그리고 부모님은 이미 나와 비슷한 성품을 가지고 계셔서 아이들 양육에 있어서 뭔가 통일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소 망설이셨던 친정부모님을 적극 영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부모님은 더 이상 내가 응석만 부릴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아닌, 회사로 치면 나와 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중역들에 해당한다. 아이들과 관련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남편, 부모님과 함께 고민해보고 의견도 적극 수렴한다. 가장 최전선에서 아이들을 관찰하시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꼭 필요한 정보원인 셈이다. 퇴근해서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을 수 있고, 육아 유경험자이신 부모님의 코멘트 역시 매우 도움이 된다. 큰 아이가 미술을 좋아한다는 것도, 둘째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엄마를 통해서 듣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께 기대했던 바를 정확히 실현해주시고 계신다. 


대신 나는 부모님에게 육아를 제외하고는 크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경영진을 보좌하는 중역들에게 빌딩관리와 식당일까지 시켜드릴 수는 없지 않은가. 가사는 주말에 남편과 함께 처리하면 되니 크게 부담 갖지 마시라고 말씀드렸고, 필요하시면 가사도우미를 쓰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어가는 집안꼴을 두고 보실 수 없었던 부모님은 조금씩 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하시더니, 지금은 상당 부분 도움을 받고 있다.


부모님의 경험과 노동으로 혜택을 봄에 있어 적절한 보수 책정은 필수다. 처음부터 한시적인 도움이 아닌 지속적인 도움을 생각했던 만큼 큰돈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월급을 드린다. 생신, 어버이날, 명절에는 회식도 있고 소정의 인센티브도 나간다. 그렇게 해도 외부 도우미를 썼을 때에 비하면 많이 적은 금액이고, 부모님도 그 돈을 바라보고 손주 육아에 두 팔을 걷으신 건 아니시지만, 그렇게라도 딸이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는 점과 월급 받는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이렇게 보수를 책정을 함으로써 나도 부모님의 노동의 무게를 함께 느끼게 되는 면도 좋은 것 같다.


나는 지속 가능한 육아를 꿈꾼다. 만약 잠깐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면 친정 근처로 이사를 하고 월급을 드리고 하는 게 오히려 번거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는 금방 지나가고,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지는데 나와 세계관이 너무 다른 사람으로 계속 교체가 되면 육아가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워킹맘인 나에게 부모님은 한 달, 일 년이 아닌 최소 10년 이상 함께 손잡아야 할 매우 소중한 인재들이 되어버렸다.


훌륭한 인재를 붙잡아 놓기 위해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언니네 집도 정기적으로 도와주러 가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또 다른 훌륭한 인재인 시부모님의 도움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여행이라도 가신다고 하면 개인 연차를 사용해서라도 기꺼이 보내드린다. 육아에 필요한 책이나 물품이 있다면 물론 비용처리도 해드린다. 이렇게 훌륭한 복지를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내가 해드리는 그 어떤 것도 딸을 사랑해서, 딸이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노년의 평온한 삶을 기꺼이 내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작고 초라해서가 아닐까. 그래도 나는 오늘도 부모님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서 가정과 육아에 있어서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고자 노력하며, 가정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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