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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r 24. 2021

워킹맘의 필수품 : 셀프 위로

음악, 걷기, '나를 위한 상대주의' 면 충분합니다!

나는 늘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다. 누가 봤을 때 항상 원하는 게 분명하고, 노력하고 그리고 결국에 그걸 얻어내는. 심지어 주변에 그 과정을 틈틈이 알리기 때문에 투명하고 누가 봐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 일명 '자기 앞가림을 매우 잘할 것만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도 항상 괜찮지는 않다. 나도 좌절하고 우울하고 피곤하며 슬프다가 웃프다가, 감정이란 늘 롤러코스터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내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미 나보다 더 좌절하고 더 우울하고 더 피곤하며 더 슬프고 더 웃픈 사람이 즐비한 이 세상에서, 직장과 아이라는 토끼를 둘 다 잡은 워킹맘에게 타인의 위로는 사치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셀프 위로가 습관이 되었다. 셀프 위로의 큰 장점은 첫째, 누군가의 도움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조용한 공간과 잠깐의 시간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과, 둘째, 상대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크게 걱정시키지 않고 늘 괜찮아 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것은 타인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조용히 감정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자존감이 많이 높아진다는 것일 것이다. 내 위기대응능력이 스스로 성장하는 느낌이다.


친구가 없어서 저러나, 가족들이랑 친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겠다. 하지만 친구들의 위로도 가족들의 위로도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상황이나 나와의 관계에 의해 왜곡될 수 있고 불필요한 잡생각을 남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승진에서 누락된 나에게 승진한 친구가 '승진이 뭐가 중요해.. 넌 정말 열심히 했어'라고 말한다면 그 친구의 본심과는 달리 그 친구는 승진을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넌 승진했으니까 그렇게 말하겠지'라는 반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나에 대해 신경 쓰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고, 그런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보듬어 주는 위로는 늘 따뜻하고 정직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그럼 셀프 위로는 어떻게 하는 건데?!!라는 궁금증이 들 것이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위로 방식을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셀프위로 3종 세트는 일단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귀에 꼽고, 가볍게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음악은 뭘 들어야 하나 어디서 걸어야 하나 이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음악과 걷기는 사실 '생각'하기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가만히 앉아있으면 사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느다. 몸을 움직일 때 비로소 뇌도 반응한다) 무엇을 들어도 어디를 걸어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너무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다소 조용한 음악이 좋을 것이고, 인파가 밀접한 곳보다는 다소 한적한 곳이 생각하기에 낫겠지만, 정말 마음이 심란할 때는 아무리 사람이 많고 음악이 시끄러워도 빠르게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나만의 세계 속에서 나는 나로부터 분리되어, 즉 제삼자가 되어 나의 상황을 분석한다. 주로 첫 질문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부터 시작한다. 어떠한 감정을 무조건 잊으려고 하거나, 쉽사리 넘기려고 하는 건 생각보다 별로이다. 왜냐하면 그 감정조차 '나' 자신의 일부인데, 내가 나 스스로를 무시해서야 되겠는가. 어떤 감정은 반드시 어떤 논리를 수반한다. 우리 감정은 생각보다 '근거 있는' 똑똑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워킹맘이 되고 나서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다른 워킹맘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 나는 커리어를 위해 일을 늘리는 것을 선택했고, 그 커리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목표를 세워 몰두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엄마손이 필요한 제법 있었고, 늘 기본적으로 이미 아이들과 도와주시는 분들께 미안함이 한 박스 깔려있는 상태인 나는 쉽게 눈치 보고 쉽게 스스로를 적당히 넘겼다. 그러다 보니 내가 스스로 초래한 상황에 대해 내가 피곤함과 서운함을 느꼈다. 사실 누구를 붙잡고 해결해야 할 서운함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으니, 나의 서운함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였다. 누군가 이 서운함을 눈치채서 우쭈쭈 해줄 때까지 불평하며 기다리던지, 내가 나를 인정해주고 적극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비슷한 환경의 친구와 만나서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고, 책을 찾아 읽을 수도 있으며, 보다 간단히 이러한 감정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은 적어도 피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다독이는 과정에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를 위한 상대주의이다. 내가 나를 위한 상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같은 상황이더라도 다른 잣대로 판단함으로써 나를 다그칠 수도, 나를 위로할 수도 있는 기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까와 비슷한 승진 사건이라면,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래, 이번에 승진대상자도 많았고, 땡땡이는 누가 봐도 남의 눈에 잘 띄는 성과를 냈고, 이런 상황에서 묵묵히 일한 내가 빛나 보일 수는 없었을 거야. 누가 봐도 나는 잘했어. 내가 나를 격하게 칭찬한다~!'라고 느슨한 잣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마음이 조금 나아지면 자기 발전의 차원에서 '왜 내가 한 일은 빛나 보이지 못했을까. 그 일을 더 빛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내가 더 빛나는 일을 쟁취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평가하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다. 상황 자체는 동일하지만 어떠한 잣대로 평가하냐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매우 다르다. 


나를 위한 상대주의는 '긍정적인면만 보기'기술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내가 전업맘이라면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과 비교되어 우울할 때,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가까이서 돌보고 함께 할 수 있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하고, 워킹맘이라면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우울할 때 "이렇게 일을 하니까 경제적으로도 이득이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늘 반대로 부정적인 면만 생각한다면, 끝없는 우울의 수렁텅이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위한 소소한 위로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와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나를 인정하고 북돋아 주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이 난다. 위로가 쉽사리 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그래도 아직 나는 살아있잖아"라는 극단적인 위로도 큰 힘이 된다. 지금 바로 주변에 기댈 사람이 많지 않다면, 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을 나에게 건네보자. 오늘은 무거운 어깨와 눈꺼풀을 치켜들며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느슨한 기준으로 나에게 말해볼까 한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어. 오늘 하루는 지금 여기에 하던 대로 그대로 있기만 해. 다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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