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워킹맘이 된 후, 내 인생은 러닝머신을 타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왜 이렇게 제자리인 거니.

by 워킹맘

러닝머신을 한 번이라도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슬슬 뒤로 밀리는 매트 위에서 장시간 사투를 벌이고 나면 결국 무감각한 기계와 여전히 제자리에 남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나마 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만이 내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나는 어릴 적 '알파걸'이었다. 남성들이 사회 지배층을 장악하는 시대에서 '이젠 여자도 머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썩 잘하진 못했어도 공부에 열을 올리며 꿈을 키우고 힐러리를 동경했던 그런 부류랄까. 딸만 셋이셨던 부모님은 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머든지 적극 지원해주셨고, 아버지의 파견으로 외국물까지 먹은 나는 알차고도 내실 있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때의 나를 회상하자면, 내 노력이 나를 배반하지 않는, 뿌린 것보다 조금 더 거두는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참 좋았던' 그런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대학 입학에 사시 합격에 결혼까지 인생의 중대사를 거침없이 헤쳐나가던 내가, 어느 날 목구멍이 좁아지는 것 같은, 꼭 고구마를 백개쯤 먹은 것 같은 느낌으로 답답한 마음으로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초기 워킹맘 시절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4개월의 짧은 돌봄을 끝으로 회사에 복귀한 건, 순전 다른 직원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복귀만 제때 해준다면 크게 뒤처지지 않으리라. 회사에 있는 시간만 집중해서 일한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와 퀄리티 있는 시간으로 보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내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면 24시간을 '미안함'과 '죄송함'사이에서 보내는 아주 힘든 시기였다.


미안함은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엄마가 곁에 24시간 지켜주는 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나 어차피 그때는 어려서 나중에 크고 나면 기억도 못하는 어른들의 말을 되뇌며 스스로 정당화를 해나가고자 했지만, 모든 이론적인 것을 떠나서 출근길에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느끼는 것은 한없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죄송함은 회사와 어른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어쩌다 퇴근이 늦게 되는 날에는 아이를 돌봐주시면 양가 부모님께 '죄송합니다'를 인사처럼 던지며 들어왔고, 어디라도 편찮으시면 모두 다 내 탓 같았다. 자율출근제를 쓰게 해 준 고마운 회사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으로 매시간 남들보다 더 집중해서 일하려고 노력했다. 회사는 대기업이었고, 이미 있는 제도를 나는 그저 활용하는 거였기에 누구 하나 나에게 대놓고 머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상사와 동료들에게 정체 없을 죄송함을 쉴 새 없이 느꼈다.


그렇게 '훌륭한' 워킹맘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회사에서는 정시 퇴근을 위해 업무에 초집중하고,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을 먹이고 놀리고 재우고 나면 나는 하루 종일 뛰고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만 가득 떠안고 지칠 대로 지쳐있기 일 수였다. 무언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남들보다 살짝 뒤처진 것 같은 느낌, 마치 러닝머신이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어서 내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여전히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약간은 워킹맘의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감정이 맞았다. 나는 당시 러닝머신 위에 있었다. 그런데 러닝머신 위에 내 인생을 올려놓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100인데, 나는 일에도 100을, 육아에도 100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200을 목표로 하니 아무리 달려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고 좌절감만 맛볼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느꼈던 그토록 미안함과 죄송함으로부터도 지금은 많이 여유로워졌다. 내가 함께 해주지 못해 그토록 미안해했던 아이들은 어느덧 자라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나를 배웅한다. 내가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아이를 100% 만족시켰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보지 못한 길이었기에 괜히 아련하고 더 좋아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한없이 죄송해했던 부모님도 그저 바쁜 딸을 도와주기 위해 육아에 동참해주셨을 뿐 내가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라지는 않으셨고,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신다. 회사에도 내가 죄송함을 느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내가 낳아 키운 아이는 이 나라의 일꾼이 되고, 추후 세금을 내서 나와 함께 늙어갈 내 동료들의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을 책임지게 될 것인데, 그러한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내가 정시에 퇴근한다고 하여 회사에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혹시라도 당시의 나와 같은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워킹맘이 있다면 워킹맘의 마음 돌봄은 본인이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의 총량을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일과 육아에 적절히 분배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가 없었을 때만큼의 일을, 일을 안 했을 때만큼의 육아를 목표치로 설정해놓으면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앞에 계속적인 상실감과 우울감만 남는다. 그리고 다소 낮아진 목표치라도 잘 달성했을 때는, 아낌없이 스스로를 칭찬해주자. 옆의 직원이 얼마나 더 훌륭한 일을 해내더라도,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친구 엄마가 얼마나 더 자애로워 보이더라도, 나는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보다 조금 느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워킹맘 5년 차의 지금은, 일도 육아도 내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밥을 먹어도 잠은 자야 하고, 잠을 자고 나면 또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내 인생에는 일하는 시간과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일과 육아를 모두 경험하고 그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 워킹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워킹맘이라는 사실이 오늘도 무척 감사하고 또 자랑스럽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의 '화'에 대한 몇 가지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