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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Nov 15. 2022

책벌레가 책을 못 읽는다

마흔 하나, 처음부터 다시


폴란드에 와서 대부분 좋은 것들 뿐인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서점이다.

한국에서 서점은 내게 방앗간 같은 곳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꼭 들러서 무엇이든 맛있게 잔뜩 주워 먹고 가는, 놀이터보다도 더 신나는 그런 곳. 하지만 이곳에 와서 서점은 내가 까막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일 뿐이다. 진열되어 있는 책의 표지도 예쁘고, 어떤 내용인지, 여기서는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인지 궁금한데 표지의 그림 외에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구글 렌즈로 번역해 살펴보기도 했으나, 책의 온도를 전하지 못하는 딱딱하고 어색한 번역으로는 전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 재미없게, 아쉬운 마음으로 서점을 드나들고 나니 이후로는 참새가 그냥 지나치는 방앗간이 되어버렸다.


겨울이 다가와서 어제 스노 타이어로 교체하러 갔는데 한 시간 후에 오라고 했다. 마침 근처에 패션 아웃렛이 있었다. 가서 둘러보고 커피나 마시고 올까 하며 걸어갔는데, 아웃렛 바로 옆에 서점이 있었다. 아무리 까막눈이어도 옷보다는 책에 끌린다. 잠깐만 보고 가지 뭐, 하고 서점에 들어갔다. Empik이라는 서점은 교보문고처럼 대형 서점은 아니지만 곳곳에 체인이 많이 있는 서점이다. 교보의 핫트랙스처럼 다양한 팬시가 있어 둘러보았다. 벌써 올해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어서 곳곳에 다이어리와 달력이 팔고 있었다. 나는 폴란드어로 아직 익숙지 않은 월, 일, 요일 등을 외우기 위해 하루의 날짜에, 일출 일몰 시간, 짧은 명언, 유용한 상식이 폴란드어로 쓰여있는 일일 미니 달력을 샀다. 손바닥 반만 한 사이즈인데, 벽에 걸고 한 장씩 떼어낼 수 있는 귀여운 달력이었다. 달력을 볼 때마다 새로운 단어 하나씩을 머릿속에 넣을 기대를 하며.



책이 있는 코너로 갔다. 읽지는 못못해도 책은 늘 예쁘고, 그 곁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좋다. 'top ksiazka'라고 적힌 것은 베스트셀러를 말하나 보다. 크시옹슈카는 '책'이라는 뜻이다.  여기 오기 전 한국에서 폴란드어를 배울 때, 내가 자발적으로 가장 먼저 물어서 배웠던 단어는 바로 '책'이었다. 그때 한창 책 읽는 엄마들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 책 읽는 걸 좋아해요 라는 문장은 통으로 외워버렸었다. 그런데 여기 서점에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이곳의 빵 사진이 있는 Chleb(빵)이라는 책도 보인다. 읽고 싶지만 읽히지 않는다... 한참을 둘러보다 그래도 영어책이면 반가울까 하고 직원에게 영어로 쓰인 책이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한 귀퉁이 두 칸에 영어책이 있었다. 일부는 원서, 일부는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폴란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었다. 자기 계발서와 소설 등이 있었고, 유명한 책이나 고전은 책의 양쪽 가장자리에 어려운 단어 풀이까지 되어있었다. 우와! 이거 영어 공부하면서 쉽게 읽히겠는데! 하며 본 순간, 뜻풀이가 폴란드어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기하게도 낯선 언어 속에 살고 있으니, 영어가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한국에 있을 때는 영어책을 보면 단어 하나씩은 알아도 전체적인 이해가 잘 안 되고 가독성이 떨어졌는데, 낯선 언어 속에서 영어는 도드라지게 잘 보이고, 훨씬 수월하게 이해된다. 말도 처음 왔을 때보다는 더 쉽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영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싶은 욕구는 10대부터, 20대, 30대까지도 이어졌었다. 10대 때는 기를 써서 교환학생을 갔고, 20대 때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하루 15분 전화영어 수업을 받았다. 30대 때는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영어로 된 영화나 강의를 들었고, 작년에는 영어 스터디 카페에 가입해 TED 강의로 과제를 인증하는 스터디를 했다. 마흔이 지난 지금도 영어 정복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식당에서나 여행할 때 하는 간단한 회화 말고, 영어로 책이 술술 읽히고, 내가 하는 강의를 영어로도 할 수 있는 완정 정복을 꿈꾼다. 지난주부터 영어 개인 레슨을 시작했다. 영어로 폴란드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영어도 배우고 폴란드도 알아가고 일석이조다.


다음 주부터는 폴란드어 레슨을 시작한다. 작년에 한국에서 4개월 정도 폴란드어의 기초를 배웠다. 마흔에 외국어라니, 머릿속에 넣는 족족 흘러나가는 허탈함을 경험했지만, 더듬더듬 읽고 따라 하고 쓰며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타국에 오면 그것이 어떤 국가이든 그 나라 말을 배우고, 그 나라 말을 쓰는 것이 지당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또 그래야만 더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굳센 믿음과 다르게 여기 와서는 늘 하는 인사만 폴란드어로 하고, 나머지는 늘 영어로 대처해왔다. 그 게으름에 반성하며 다시 하나씩 배우려 한다. 적어도 식당에서 주문할 때, 주유할 때, 물건 살 때, 여행할 때 이들의 언어로 말하고 들을 수 있도록.


언젠가는 서점에 가서 폴란드어 책이 읽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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