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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Sep 16. 2022

내 인생에 이 날이 올 줄이야

김치 담그는 여자

"김장문화는 아마 우리 세대에서 끊기지 않을까?

나도, 내 친구들도 아무도 김치를 담그지 않잖아."


김치를 무척 좋아하는 나이지만, 김장문화는 사라질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맛있는 김치를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나도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아이 키우는 엄마가 되었지만 김치를 담그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끔 엄마가 이모네랑 같이 김장하다가 몸살 낫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어젯밤에 혼자 늦게 까지 절구고 버무리고 하느라 혼났어~'하며 푸념하며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오시면 "힘들면 그냥 사 먹지 왜 그렇게 고생해"라고 말하곤 했었다. 김치를 담근다는 건, 요리를 잘 안 하는 나에게는 '넘사벽'이었고 그래서 관심조차 없었다. 엄마가 갖다주고 시댁에서 싸주고, 김치는 냉장고에 가득 차 남아돌았고, 냉장고 정리할 때면 늘 쉬어서 가득 버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폴란드에 오니 아무도 김치를 주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무척 비싸다. 한국 마트에서 파는 것은 대부분 한국 가격의 두 세배다. 그렇다고 못 사 먹을 정도의 값도 아니고, 다른 필요한 것은 사는데, 그동안 늘 공짜였던, 남아돌던 김치를, 두 세끼면 다 먹을 것 같은 이 작은 포장 김치를 이 가격에 사는 것은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다. 사서 아껴먹고, 한 두 조각 남아도 절대 버리지 않고 다시 넣어두었다.


폴란드에 와서 한국 지인 집에 갔을 때 집밥을 차려주었는데 김치를 직접 담갔다는 말을 했다.

"김치를 직접 담갔다고요?"

"나도 한국에 있을 땐 안 했어요. 여기 있으면 하게 돼요."

하며 웃었다. 그래도 나는 이걸 할 리가 없다.


다른 지인의 집에 갔는데 자기가 담근 김치라며 김치냉장고에서 커다란 김치통을 꺼냈다.

"이걸 직접 담갔다고요???"

정말 맛있었다. 시골 할머니 댁에나 가야 먹어볼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저도 여기 와서 처음 해봤어요. 고춧가루랑 액젓만 맛있으면 맛있게 돼요."  

시댁과 친정이 전주인데 어른들이 맛있는 고춧가루랑 액젓을 든든하게 챙겨주셔서 맛있는 김치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걸 할 리가 없다. 나랑은 다른 사람들이구나. 요리 좀 하는 엄마들이구나.


아이들 여름방학 때 친정엄마가 오기로 하셨다. 엄마랑 다닐 여행 계획을 짜고, 내어 드릴 안방을 정리하고, 오면 어디 갈까 무얼 할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다가 문득,

'엄마한테 김치 담그는 걸 배워볼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재미있을 것 같았고, 진짜로 배워서 할 수 있게 되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았다.


"엄마, 맛있는 고춧가루 조금만 가져와줘"


내 입에서 고춧가루 갖다 달라는 말이 나오다니. 김치 담그는 걸 알려달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런 변화만으로도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고춧가루를 가져와서 하시는 말,

"거 봐, 그때 챙겨가라니까는..."

오기 전 해외이사로 짐 정리를 할 때 고춧가루는 필요 없다고 엄마한테 돌려주었다. 간장, 된장 등은 하나씩 사서 챙겨 넣었지만 고춧가루는 집에 있던 것도 다 주고 왔다. "그래도 좀 가져가야지"라는 엄마 말에 "여기서도 안 쓰던 걸 가서 쓰겠어?"라고 받아쳤었다. 그러니 한 소리 하실만하다. 엄마들이 잘 쓰는 말 '거 봐'.



내 손으로 처음 배추를 샀다. 내가 항상 가는 마트 야채 코너에 배추가 팔고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엄마는 밀가루 있어? 절구통 있어? 마늘 있어? 참치액젓 있어?라고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다행히 재료들은 있었는데 배추를 절구고 버무릴 커다란 통이 없어서 집에 있는 가장 큰 냄비를 사용했고 그래도 여유가 없어서 깍둑썰기 대신 포기로 썰어 소금에 절였다. 소금에 절이는 동안 김치 속을 준비했다. 엄마는 양파를 썰고, 마늘을 까고, 파를 썰었다. 풀을 쒀야 하는데 밀가루가 없다고 하니(정말 요리 안 하는 여자..) 엄마는 밥으로도 대신할 수 있다며 밥을 조금 펐다. 밥만으로는 믹서에 잘 안 갈리니 준비해둔 마늘과 약간의 양파와 멸치액젓을 넣고 믹서에 갈았다. 약간 걸쭉하게 풀이 지자 그 풀에 고춧가루를 넣고 남은 양파와 파를 넣고 섞어 풀을 만들었다.



"고춧가루는 얼마큼 넣어?" "마늘은 몇 개 넣어야 해?" "참치액젓 얼마큼?"과 같은 나의 핵심 질문에 엄마는, "이번엔 배추가 얼마 안 되니까, 쪼끔만 넣어도 돼." "양이 얼마 안 되니까... 해보고 싱거우면 마지막에 참치 액젓으로 간을 하면 돼."와 같은 가늠할 수 없는 답들을 계속하셨다. 답답하지만, 이걸 내가 다음에 제대로 만들 수 있겠냐 싶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요리할 때 이런 식이다. 레시피가 있어도 정확히 계량하기보다 대충 감으로, 눈대중으로, 간 보고 아니면 더 넣으면 되니까. 이게 엄마한테 물려받은 거였구나.


소금에 절이기만 해도 배추가 맛있었다. 버무리기 좋게 깍둑 썰어서 야금야금 집어먹다가 양념과 버무렸다. 그러자 바로 내가 아는 그 김치의 자태가 드러난다. 정말 신기. 김치는 하루 종일 걸려서,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 이렇게 금방 만들 수 있는 거였어??

역시 요리는 알면 쉽고 모르면 넘사벽이다.



버무린 김치가 맛있어서 맨 손으로 또 집어먹고 또 집어먹고, 그리고 따뜻한 밥과 함께 또 잔뜩 먹었다. 배추를 두 포기 사서 담갔는데 절일 때는 많아 보이더니 완성돼서 반찬통에 담으니 딱  통이다. 생각보다 양이 적어서 아쉬웠지만, 냉장고에 김치가 쌓여있다니  든든하다.


김치를 너무 맛있게 잘 먹어서 엄마가 가기 전날 김치를 한 번 더 담가주고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엄마가 하는 거 한 번만 더 보면 혼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두 포기를 더 샀고, 이번에는 깍둑 썰어서 절구고 버무릴 수 있도록 커다란 스테인리스 절구통을 샀다. 마트에서 절구통을 사고 있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소했다. 깍둑 썰어서 소금에 절이니 훨씬 수월하다. 눈대중의 양이지만 무엇이 들어가고 어떻게 풀을 쑤는지도 더 정확히 각인됐다. 그리고 김치통  개가 더 냉장고에 쌓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엄마가 다 만들고 내가 마지막에 앞치마 두르고 찍은 연출사진 >.<


한국 지인들에게 김치를 조금 나눠줄까 싶어 김치통을 꺼냈다가도, 많이 주긴 아깝고 조금 주긴 민망해서 다시 그냥 넣어놓는다. 이 김치가 많이 사라지면 나는 마음이 다시 가난해질 것 같다. 이 부자의 기분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 김치가 시고 남아서 김치찌개도 하고 김치볶음밥도 하는 사치를 누려볼 것이다.


엄마 없이 나 혼자서 김치 담그는 날은 언제 찾아올지, 찾아는 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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