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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Sep 07. 2022

침묵할 자유

제발 혼자 있고 싶었다

제발 혼자 있고 싶었다.

8월이 되어 시작된 아이들의 방학, 새로운 엄마들과의 만남, 친정엄마의 방문, 시칠리아 여행, 엄마와의 대화, 아이들과의 놀이. 사실 모든 것은 자발적이었고, 반갑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하루에 잠시라도 혼자의 시간을 가져야 충전이 되는 나로서는 한 달 내내 정신없는 상황과 대화 속에서 허우적대며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9월을 맞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통째로 혼자 있자니, 너무 좋은데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상태가 3일 정도 이어졌다. 아니, 이렇게 조용히 침묵할 수 있다니, 아무 이야기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너무 오랜만에 맞이하는 소중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첫날은 아이들 방의 이불을 개고, 아침 먹은 것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돌리고, 널브러진 장난감을 정리했다. 시간이 훅 지나가버린다. 그러다가 '이 소중한 시간을 집안일을 하는 데 다 쓸 순 없지'하고 내 방에 들어가 책을 골랐다. 하지만 나도 등원 준비로 일찍 일어난 탓에 졸려서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누워 잠이 들었다. 아무의 방해도 없이 잠시 잠을 청할 수 있다니 정말 큰 사치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는 6월에 신청해두었는데 몇 개 듣지도 못한 글쓰기 강의를 들으며 메모를 했다. 그리고 글쓰기 강의의 작가가 말한 대로 아주 솔직하게 글을 하나 써보았다. 누구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억눌린 마음을 글로 썼다. 조금 후련해졌고, 한편으로 이 글이 저장되어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오늘은 그동안 보고 싶었던 '나의 해방 일지'를 봤다. 글을 써야지, 책도 읽어야지 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부담스러운 의무감이 있었지만, '제발 자유로워져! 난 지금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그러기 위해 여기 온 거라고' 속으로 외치며 정말 오랜만에 TV를 켰다. 드라마 속 과묵하고 조용한 '미정이'(내 이름과 똑같다니!)를 보며 중학교 때 만난 친구 주연이가 떠올랐다. 어제가 주연이 생일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주연이에게 안부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에 조금 쌀쌀해서 따뜻한 이불속에서 TV를 봤는데 오후가 되니 따뜻해져서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나무, 숲, 호수를 끼고 있는 아주 예쁜 공원.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시원하고 사람은 거의 없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의 소리와 호수 한가운데서 떨어지는 분수의 소리가 들린다. 자전거 타며 지나가는 어린아이의 소리. 그리고 또 바람 소리...

아... 정말 좋다. 침묵할 수 있는 자유... 입을 다물고, 이 자연의 소리를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침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한 달 동안 내가 얼마나 침묵하고 싶었는지 느껴진다. 해와 바람이 적당한 벤치를 골라 '틱낫한 명상'책을 골라 읽었다. 책의 이야기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다시 호수를 한 바퀴 돌었다.


대학교 때 검사한 MBTI에서 나는 중간에 가까운 E(외향형)였고, 마흔이 넘어 다시 해 본 검사에서 나는  I(내향형)로 바뀌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에너지를 얻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도 있어야 충전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점점 더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뜨겁게 보낸 8월은 생동감을 느끼며 즐거웠지만, 그래서 더욱 목이 말랐을 침묵과 고요가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9월의 시작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홀로 바라보며 멍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 몇 시간 동안 침묵할 수 있는 이 자유가 정말 감사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오기 30분 전.

오늘 저장한 이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지 않길.

어제처럼 또 몇 시간 만에 버럭 하는 엄마로 바뀌지 않고

이 평온과 고요의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잘 전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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