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한국의 동지들과 줌으로 독서모임을 하고 나니 배가 많이 고팠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오징어 젓갈이 보였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면 종종 한국 마트에 가서 한국 과자를 사달라고 조를 때가 있는데, 어제 억지로 끌려가듯 갔다가 냉장고에서 '오징어 젓갈'을 발견한 것이었다. 여기 와서 보지도 먹지도 못했던 젓갈.. 하얀 밥에 올려먹으면 정말 맛있을 것 같아 아이들이 고른 고래밥, 짱구 과자와 함께 오징어 젓갈을 샀다. 그것이 오늘, 가장 배고픈 시간에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밥이 없었다. 혼자 먹기 위해 쌀을 씻고 밥을 하고 기다릴 만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효율 추구형 인간이다. 하지만 뜨거운 하얀 밥에 오징어 젓갈을 올려 먹는 그 맛! 그 맛을 기어이 보고 싶었다. 배가 고프니 된장찌개도 먹고 싶어 졌다. 그래. 밥을 짓자! 된장찌개를 끓이자!
최대한 단시간에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점심을 먹어오던 내가 이런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어제 읽었던 책에서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몸을 벗는 순간 알아차린다.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었고, 또한 자기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 했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음이란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말은 여기 말고 저기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너희의 지적 허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지금 여기'를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깨달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 마음의 구조와 기억의 지도 I AM, 김종률
나의 신념에 일침을 가하는 메시지. 이 말은 내게 찌릿하게 다가왔다. 밥에 적용시켜보자면, 밥보다 무언가 더 값진 일, 더 중요한 일, 더 효율적인 일을 하고자 밥 먹는 시간을 아꼈고, 차리고 치우는 시간을 아까워했던 나였다. 하지만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내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밥 한 끼를 차리고, 밥을 아주 맛있게 먹는 일 말고 무엇이 더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해석이 거창한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밥을 짓고 찌개를 끓여 행복을 맛보기로 했다.
쌀을 씻었다. 유독 쌀 씻는 일을 성가시게 여겨 밥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갓 지은 밥의 그 윤기와 맛의 차이를 느끼고부터는 쌀 씻어서 밥을 안치는 일이 조금 보람되게 여겨진다. 폴란드에 올 때 밥통을 새로 사 와서 모르고 있었는데, 버튼이 잘못 눌려 "고화력으로 취사를 시작합니다"라고 밥통이 말한다. '고화력은 또 뭐지?' 자세히 보니 고화력이라는 버튼이 있었고, 기존에는 29분 걸리던 것이 34분으로 늘었다. 배가 무지 고픈데 5분을 더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왕 정성스럽게 먹기로 한 것, 그래, 5분 더 참아서 새로운 맛을 보자.
밥이 되는 동안 된장찌개. 코인 육수(해외 살이 한국인들의 필수품)를 2개 넣고 풀었다. 물이 끓는 동안 양파를 슥슥, 애호박을 송송 썰고 두부를 준비해두었다. 맛있는 육수가 금세 완성돼 양파와 애호박을 넣고 조금 익었을 때 즈음 구수한 시골된장을 먼저 풀었다. 그리고 칼칼한 찌개 된장을 풀었다. 마지막에 두부를 또각또각 썰어 넣어 완성!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하였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쿠쿠~"라며 잠시 후에 밥도 완성. 밥솥 뚜껑을 열었는데 뭔가 평소와 냄새가 다르다. 이 냄새는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니가 무쇠 압력밥솥을 가스불에 올려서 밥을 짓고, 그 뚜껑을 열었을 때, 그 냄새! 밥을 저어보니 솥 아랫부분은 무쇠 압력밥솥의 밑부분처럼 약간 갈색으로 누러 붙어 있다. 오~ 이거 누룽지도 가능하겠는데?
밥을 푸고, 된장찌개를 담고, 마지막으로 새빨간 오징어젓갈을 담았다. 김치도 조금 꺼냈다. 밥은 이전에 먹던 밥과 다른 손수 지은 밥 맛이 낫다. 고소한 냄새. 쫀득함이 더해지고 구수한 냄새가 더해진, 진짜 할머니들이 해준 것 같은 밥 맛(쿠쿠 홍보가 아님^^;). 그 밥에 오동통 길쭉한 오징어 젓갈을 올려 입 안으로 꿀꺽. 음~~ 오~~ 이건 정말 맛있다. 오징어 젓갈을 올리기 위한 쌀 씻기와 밥솥의 수고와 기다림. 결코 헛되지 않다.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호로록. 우와.. 이건 정말 고향의 맛. 내 손에서 이런 집밥, 집된장의 맛이!?
혼자서 조용히, 밥에, 된장 맛에, 오징어 젓갈 맛에 집중하며, 종종 초록 창밖을 바라보며, 한 숟가락 한 숟가락에 감탄하며 밥을 먹었다. 행복하다. 더없이 행복하다. 지금 여기의 나는, 나를 위해 정성 들인 밥과 반찬을 나에게 대접하고, 그것을 음미하며, 이 순간의 절정을 누린다. 밥 한 끼에 집중하는 것, 내가 나를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잘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