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새로 이사 온 진환이, 힘센 동네 친구 우철이를 무서워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몸집이 훨씬 크고 태권도 학원에서 여러 기왓장도 단박에 깨뜨리는 우철이가 진환이가 놀 때 온갖 훼방을 놓고 과자도 빼앗아간다. 다른 친구들도 진환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외롭고, 우철이만 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진환이는 밤마다 꿈을 꾸는데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뭐든 씩씩하게 잘할 수 있어서 공룡 꿈꿀 때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으니 나의 어린 시절 꿈 생각이 났다. 내 기억으로는 학창 시절부터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꿨다. 그 꿈은 꽤 오래 이어져서 성인이 된 후에도, 결혼하기 전까지도 종종 꾸었었다. 하늘을 나는 느낌이 너무 생생하고, 하늘에서 본 그 풍경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들이어서, 나는 꿈에서 깨어나면 마치 실제로 겪은 것 같아 무척 행복했다. 때로는 바다 위를 날며 돌고래처럼 바닷속을 점프하며 드나들기도 했고, 때로는 산 위를 날아가며 분홍 벚꽃과 연둣빛, 초록이 알록달록한 예쁜 풍경을 보기도 했다. '우와, 꿈으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행복했다.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면 좋겠어> 대교
몇 해 전 상담심리대학원에서 '꿈 집단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의 꿈에 대해 해석하게 된 것은, 내 꿈이 내 삶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이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보상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그 꿈을 꾸던 시절 내 삶은 정말 어려웠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고, 술주정을 하셨고, 엄마 아빠의 다툼이 잦았고, 때로 폭력도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낯선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도, 우철이 같이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지만 외롭고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매 학기 대학등록금을 걱정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 후에도 전국의 방송사에 지원하다 낙방하기 일쑤였다. 입사를 한 후에도 가족이 모두 외국에 있고 홀로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이 늘 외롭게 느껴졌다. 물론 항상 힘든 것은 아니었고 그 가운데 좋은 날들이 훨씬 많았겠지만, 내 마음은 늘 불안하고 외로워 꿈속에서 강한 보상을 얻으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결혼 후 마음의 안정을 찾고 더 바랄 것 없을 만큼 충만한 상태가 되자 나는 더 이상 하늘을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꾸지 못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어찌 보면 현실에서 행복하니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하늘을 나는 그 짜릿한 기쁨과 그 아름다운 풍광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나로서는 정말 아쉬운 일이다.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면 좋겠어> 대교
책 이야기로 돌아오면, 진환이는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어서 심술쟁이 우철이를 아주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려놓고 백 번 사과할 때까지 내려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찌나 귀여운지. 또 어찌나 힘들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을지 짠하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수아는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면 뭐 하고 싶어?"
"구름 위에다가 성을 짓고, 엄마랑 아빠랑 살고 싶어."
"아~구름 위에서 우리 넷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아니, 셋이. 주아는 말고."
당연히 가족 넷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아 이름이 빠져있었던 것을 내가 놓친 것이다.
"아 주아는 빼고~ 그럼 주아는 혼자서 어떻게 살지?"
"그러면 주아는 옆에다 집을 짓고, 대신 따로 살아야 돼"
라고 한다. 수줍고 두려움이 많은 수아는 적극적이고 쾌활한 두 살 어린 동생 주아를 늘 질투한다. 갓난아기인 동생을 처음 만난 날부터 신기한 듯 머리를 쓰다듬다가 한 대 때렸을 정도니, 자고로 첫째에게는 둘째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법. 그런데 주아가 온갖 애교와 똘똘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예쁨을 받으니, 그 존재는 더더욱 미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공룡이 되면 구름 위에 우리 셋만의 터전을 지어 살고 싶다니.
그 옆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주아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아는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면 뭐 하고 싶어?"
"주아는, 구슬 아이스크림 솜사탕맛 먹으러 루피스 월드에 갈 거야!"
구슬 아이스크림 중에 솜사탕 맛이 있는데 그게 주아가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보다 좋다고 할 정도. 그리고 루피스 월드는 우리가 자주 가는 키즈카페 이름인데, 그곳에만 그 구슬아이스크림이 판다. 이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질문을 해도 "구슬 아이스크림 솜사탕맛!"이라고 해서 늘 다 같이 까르르 웃곤 하는데, 하늘은 나는 엄청난 공룡이 되어서까지도 그걸 먹으러 가겠다니. 아이코.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다 보면 깔깔 거리며 장난으로 대답할 때가 많지만, 그조차도 아이의 마음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책을 끝까지 쭉 읽지 않고 여러 장면에서 질문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고, '똥방구'라고 대답하며 둘이 까르르 웃기도 하고, 은연중에 많은 속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책을 두 권 골라 테이블에 간식과 함께 올려둔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하고 집에 오면 그저 맛있는 것 먹고 편안한 소파에서 tv 보면서 쉬고 싶을 것이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된다. 특히 해외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종일 생활하면, 스스로 의식하지 않더라도 피로감이 꽤 높을 것이다. 수줍고 두려움이 많은 수아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면, 수납장에 간식칸을 뒤져서 과자나 초콜릿을 먹고 곧장 tv를 보곤 했었다.
이제는 몸에 안 좋은 것을 많이 먹지 않도록 되도록 과일로 간식을 미리 준비해 둔다. 곰돌이 접시에 눈, 귀, 코, 입 모양으로 세팅해 두면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먹는 동안에는 tv보지 않기로 하고, 대신 엄마가 재미있게 책 읽어주는 시간이라고 알려준다. 목소리도 다양하게 오버해서 쓰면 아이들이 재미있어한다. 첫째와 둘째 취향에 맞춰 한 권씩 고르면 더 좋다. 아이들이 또 읽어달라고 하면 또 읽어주고, 다른 책을 가져오면 더 읽어준다. 그만 보고 싶어 하면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바쁘다 보면 하루에 한 권도 같이 못 볼 때가 많은데, '욕심 없이 하루 딱 두 권'이라 마음먹으니 편하고 아이들도 부담 없다. 수아가 책 재미있다며 "엄마, 책 잘 골랐다."라고 칭찬이라도 해주면, 능력 있는 북 큐레이터가 된 것 같아 무척 뿌듯해진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오늘 잘 놀았어?" "오늘 뭐 했어?" "누구랑 놀았어?" "요즘 누구랑 제일 친해?"라고 물어도 단답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의 이야기를 통해서 질문을 하면 아이들은 한없이 수다쟁이가 된다. 서로 말하려고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그렇게 잠시 아이들과 맛있는 거 먹으며 수다 떨고, 책 보며 이야기하고 까르르 웃고 나면 그 후에는 자유시간을 준다. 나와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 또한 허용하기로 했다. 아이들도 긴장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전에 퇴근했을 때 나를 떠올려보면, 아이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면 그 사이에 나는 편하게 저녁 준비를 하면 된다.
폴란드에 오기 전 독서치료 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던 터라, 이곳에 오면 영상 다 끊고 '독서육아를 해야지!'하고 굳게 마음먹었던 나였다. 해외 이사 컨테이너에도 거의 절반은 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경험해 본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과 무리하게 애쓰면 뭐든지 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악착같이 계획하면서 육아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영상을 끊고 무언가를 통제하려 할수록, 나도 아이들도 스트레스가 쌓여 서로 싸우고 화낼 일만 많아졌다. 정서를 돌보지 못하는 건 육아에 더욱 치명적인 일이다.
오히려 매일 이렇게 가볍게 간식 시간에 두 권씩 읽으니 책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의무감에 '독서 육아 해야지!' 했을 때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 상황이나 시간이 되길 기다리다 하루에 한 권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은 아이들이 그 시간에 재미있게 들어주고 이것도 읽어달라며 다른 책도 들고 온다. 어쩌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여태껏 그런 판을 잘 못 깔아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1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야 독서육아가 시작된 것 같다. 무리하지 말고 즐겁게, 큰 기대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공룡이 되면 좋겠어> 대교
참, 책의 결말은 이렇다. 진환이가 꿈에서 깼는데 아침에 우철이가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있잖아, 어젯밤 내 꿈에 하늘을 휙휙 나는 공룡이 나타났어. 나를 높은 건물 위에 올려놓고는, 너한테 미안하다고 백 번 말하지 않으면 내려주지 않겠다는 거야. 얼마나 무서웠다고..."
작가는 어떻게 이런 결말을 생각했는지 이야기도 마음에 쏙 든다. 꿈에 관심이 많은 내게,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내게도 너무나 재미있었던 책! 오늘은 또 어떤 책을 골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