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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Oct 20. 2022

몽마르뜨 화가의 거리에서, 추억을 사는 그림

화가의 거리를 처음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2013년, 결혼한 지 3개월 된 남편과 몽마르뜨 언덕에 올랐을 때, 언덕 아래로 보이는 파리의 풍경과 샤크레쾨르 대성당을 둘러본 후 옆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아주 작은 광장 같은 거리에 그림이 빽빽이 놓여있었다. 화가들은 두 평 남짓한 공간을 하나씩 차지하며 자신의 그림을 빼곡히 걸어두고, 관광객과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손님이 없으면 자기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워낙 좋아하는 나여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으로 마주했던 곳에 한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과 흰색의 색감만을 사용해 그린 유화. 무심한 듯 나이프로 뚝뚝 찍어 바른 그림, 그렇지만 멋스럽게 표현된 개선문과 거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바퀴를 둘러보았지만 다시 이 그림을 찾아 돌아왔다. 두 가지 색감만으로 파리의 풍경을 심플하고도 세련되게 담아낸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 이 그림을 늘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때로는 거실에, 때로는 내 책상에, 내 작업실에, 찻잔들 옆에, 늘 나는 이 그림을 가까이에 두며 파리의 낭만을 떠올리곤 했다. 9년 동안 질리지 않고 바라보던 그림이었다.


2013년 화가의 거리에서 산 그림


언니네 아이들과 같이 파리 디즈니랜드에 가기로 했을 때, 내가 원하는 낭만적인 파리 여행은 포기했었다. 그러나 역시 똑똑하고 효율적인 우리 언니는 "벤이랑 사비나도 있으니까 밤에 하루씩 번갈아서 애들 재우고, 파리 시내에 가서 멋진 저녁도 먹고 그러자!" 정말 굿 아이디어다. 조금만 융통성을 가지면 꼭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보다 숙소가 시내에서 멀어서 밤에 외출하지 않고 아침 일찍 나섰다.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다음 날이라 아이들은 숙소에서 쉬고 싶어 했고, 큰 조카 사비나와 벤이 기꺼이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해준 덕분에 언니와 나는 파리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탔다. "너는 뭐 하고 싶어?" 제한된 시간 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면 당연 '화가의 거리'에 가서 구경하고 그림을 하나 사는 것이었다. 요즘 달리기에 푹 빠진 언니는 센 강변을 따라 뛰고 싶다며 이미 러너(runner)의 복장으로 나왔다. 언니는 미리 내려 강변을 뛰기로 했고, 나는 지하철을 갈아타고 몽마르뜨에 갔다가 합류해 점심을 함께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기대하지 못했던 혼자만의 파리 여행. 단 몇 시간이지만, 유모차 없이 지하철을 타고, 몽마르뜨 언덕의 계단을 홀로 가볍게 오를 수 있다니! 다시 9년 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몽마르뜨 언덕과 성당은 가볍게 지나가고 화가의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 길이 맞았었나? 기억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데, 갑자기 그 작고 아담한 광장, 화가의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더욱 신기한 건 내가 9년 전에 광장 입구에서 봤던 그 첫 번째 집의 할머니가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걸려있는 그림을 보고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백발의 짧은 머리에 작은 키, 종종 담배를 피우던 그 할머니는, 여전히 백발의 단발이었고,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9년 전에 와서 그림을 샀었어요. 정말 멋진 그림이었어요."


할머니는 걸걸한 목소리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그림들이 여전히 예쁘다고 했더니 오늘도 사면 싸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때 투 톤의 파리 풍경 그림 외에도 입체적인 꽃그림이 있어서 그것도 선물용으로 샀었는데, 지금은 꽃그림만 그리는 것 같았다. 예쁘긴 했지만 나의 취향은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뭔가 달라지거나 업그레이드되는 것 없이 같은 그림들을 계속 찍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다시 찾은 이곳에서 같은 화가에게 다시 그림을 사면 뜻깊을 것 같아 그림을 유심히 보았지만 아쉽게도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어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유화였지만, 물 번짐이 멋진 수채화도 있었고, 펜화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화가와 관광객 모델도 있었다. 양쪽으로 머리를 묶은 살 남짓의 예쁜 꼬마 아가씨도 손가락을 빨며 모델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나도 기념으로 한 번 그려보고 싶었지만, 언니와 곧 만나야 해서 기약 없는 다음으로 미뤘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인지라 9년 사이 나의 취향도 수준도 많이 달라져서, 사실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림값도 그때는 몇만 원 정도에 샀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작은 크기의 그림도 150에서 200유로 정도 했다. 예전처럼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찾을 수.. 있을까?? 기대와 불안을 간직하며 한 바퀴 둘러보고 있는데,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이프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대부분 자신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뒤편에서 주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 할아버지는 그림이 걸려있는 곳에 캔버스를 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개선문과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추상적인 점과 선으로도 충분히 표현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뒤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건물과 사람들을 다 그린 후에 나뭇잎을 찍어 그렸고, 마지막에 과감함 붓터치로 나무기둥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레스토랑과 카페의 글자를 입혔다. 그리고 사인을 했다. TASKO 2022. 나이프로 뚝뚝 찍어 바르는 그림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할아버지의 붓터치와 색감이 섬세하게 느껴져 더욱 좋았다. 20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완성되어있는 작품과 다르게, 그 과정을 지켜보고 나니 그림에 더욱 애정이 생겨서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킹 테이프를 뜯는 것까지 모든 것을 곁에서 함께 한 후 그림을 샀다. "So, beautiful!" 할아버지 그림에 대한 감탄의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섬세한 포장, 친절한 말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부드럽고 따뜻함이 이 그림에 추억을 더했다.


그림은 어쩌면 추억을 사는 것이다. 내가 9년 전 이곳에서 샀던 그림을 늘 곁에 두며 파리에 대한 로망을 품으며 지냈는데, 만일 그 그림이 서울 어딘가에서 팔고 있었다면 아마 사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샀더라도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이 그림을 보면,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하나하나 색을 섞고, 나이프로 섬세하게 사람을 그리고, 과감한 붓터치로 나무기둥의 획을 긋던 그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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