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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Apr 19. 2023

오스트리아 빈으로 자유부인 나들이

비엔나 여행기 1 - 쿠어살롱


세 여자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그로부터 한 달 전, 두 아들을 둔 생기발랄 여인과, 세 아이를 둔 넉살 좋은 그녀, 그리고 두 딸의 엄마인 내가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하다 시작됐다. 1월 새해였기에 우리의 화두는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였다. "올해 나의 목표는 여행인데!"라고 내가 말했다. 두 여인들도 "나도, 나도!"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 셋이 신나게 놀면서 여행 다니면 되겠네요!"

"어디부터 갈까요?"

"나 오스트리아에 너무 가보고 싶은데"


이 몇 마디 대화로 우리는 각자 휴대폰의 달력을 열었고, 그로부터 3주 후인, 2월 둘째 주 주말로 날짜를 잡았다. 나도 추진력 강하다는 말을 꽤 들어왔지만, 이 여자들은 나보다 더 하다. 완전 내 스타일이다. 아이들 가을 방학 때 이 엄마들과 아이들이 다 함께 우르르 10명이 여행 간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노키즈' 여행이었다. 그 주 주말은 남편들이 아이들을 봐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모두 승낙해 주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차로 5시간 30분.


"몇 시에 출발할까요?"

"새벽 4시에는 출발할까요?"

"3시에 출발합시다!"


설레는 주말 1박 2일을 어떻게든 알차게 보내고 싶은 세 여인은, 출발시각을 새벽 세 시로 잡았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그 시간에 깨어있던 적이 없었지만, 되도록 빨리 출발해 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것을 보고 싶었다. 그다음 주에는 만나서 숙소를 예약하고, 인문학 가이드 투어를 하나 신청하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예약하며 준비를 했다.


드디어 세 여인의 첫 노키즈 여행 날. 캄캄한 새벽에 한 집에 모여 한 차에 짐을 실었다.

"애들 데리고 다닐 때는 한 짐이었는데, 혼자 가니까 짐이 없네."

그래도 캐리어에 짐을 넣어 온 나와는 달리, 두 여인은 작은 천가방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왔다. 그리고 생기발랄 여인은 늘 잘 챙기는 그녀답게 큰 아이스백에 주먹밥도 만들어 넣고, 쑥개떡, 과일 등등을 잔뜩 챙겨 왔다. 한 사람이 운전하고, 보조석에서 챙겨주고,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자고. 그렇게 돌아가면서 3교대를 했다. 그렇게 차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며 한 사람에 두 시간이 채 안 되게 운전하니 체코와 오스트리아, 두 국경을 넘어 금세 빈에 도착했다. 빈은 폴란드에 온 이후 늘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5시간 반이 걸리니 주말에 오기는 너무 멀고, 남편과 같이 운전해도 시간이 꽤 길고, 어린아이들이 차에 오래 있기도 힘들 것 같아서 좀처럼 오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순식간에 순간이동한 듯 도착하다니! 역시 노키즈면 모든 것이 쉽다.


근처의 판도르프 아웃렛에서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따로, 또 같이 둘러보던 세 여인은 허기가 져서 그곳을 빠져나와 스테이크 하우스로 갔다. 스테이크 집이어서인지 식당에 있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남자였고, 남자 단체손님들도 있었다. 동양 여자 셋이서 들어오는 것이 신기했는지 모두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아줌마인걸. 점원에게 추천받아 현지 맥주를 한 잔 시켜 나누어 먹었다. 부드럽고 알싸한 로컬 비어의 맛이 온몸에 퍼졌다. 스테이크 두 개와 '스테이크'샐러드를 주문했고, 양이 꽤 많았지만 깨끗이 먹어치웠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몹시 피곤했던 우리는 빈 시내의 숙소로 들어와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 침대와 소파에 걸쳐 쉬는 동안 생기 발랄 그녀는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아나운서가 실제로 하는 발음연습'이라며 간장공장 공장장과 비슷한 '촉촉한 초코칩'버전을 버겁게 읽다 빵 터졌고, 나보고 해보라기에, 전 아나운서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했다가 이런 걸로 칭찬받는 것이 웃겨 또 웃었다. 넉살 좋은 그녀는 영어 앱으로 공부한다며 AI와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AI가 못 알아듣고 자꾸 대화를 끝내려 해서 또 눈물이 쏙 빠지게 다 같이 깔깔댔다. 정말 별 것 아닌데 아이들 없이 여자 셋이서 여행 온 우리는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대는 소녀 감성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아직 빈 시내는 나가지도 않았는데, 이미 우리는 충분히 신나 있었다.


음악의 도시 빈이니까 멋진 공연 하나 보자고 미리 예매해 둔 공연이 토요일 저녁이었다. 옷은 좀 차려입고 가는 것이 좋다는 후기를 봤던 터라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넉살 좋은 그녀는 야심 차게 구두까지 챙겨 왔는데, 발이 부어 신을 수가 없어 패스. <쿠어 살롱>에서 열리는 콘서트였다. 유럽은 대부분 공연이나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외투를 맡겨놓고 가벼운 몸으로 들어가는데, 여기는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조금 일찍 왔던 터라 자리라도 먼저 맡고 천천히 옷을 맡길까 했는데, 외투를 맡기고 나서야 공연장이 있는 2층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홀이 따뜻하지는 않아서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추워졌다. 공연 끝날 때까지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것 같아서 중간 쉬는 시간에 내려가 너무 추우니 외투를 돌려받을 수 있겠냐 물었으나 그건 안 된단다. 내 옷도 맘대로 입을 수 없다니... 대신 무릎담요 같은 것을 하나 주었다. 나는 시뻘건 무릎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공연을 봤다. 원피스는 왜 차려입고 온 거니.

요한 슈트라우스가 지휘했던 공연장 '쿠어살롱(Kursalon)'


<쿠어살롱>의 홀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딱 아담하고 좋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플루트, 클라리넷 등 딱 열개 악기, 열 명의 연주자였다. 이곳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실제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곳이라고 한다.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곡이 연주되었고, 연주 중간마다 발레와 오페라의 협연이 어우러져 지루할 틈 없이 볼거리가 풍성했다. 나는 이날 유독 콘트라베이스의 소리에 매료되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유독 열정적인 몸짓으로 연주를 해서 눈길이 갔는데, 그곳에 눈길을 두니 콘트라베이스의 소리가 더 확대되어 들리는 것 같아서 점점 더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내 옆에 있던 그녀도 콘트라베이스가 너무 멋지다고 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는지, 공연이 끝나자 몇몇 사람들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어쩌면 그가 배우처럼 잘생기기까지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냉큼 줄을 섰고,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혼자서만 공연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달갑지 않을 법한데도 그 연주자는 아주 착한 미소로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콘트라베이스 튕기는 법을 알려주며 해보라고 그 귀한 악기를 내어 만지게 해 주었다. 역시, 아름다운 연주자는 마음도 아름다운 법이다.


오케스트라 연주, 발레, 오페라가 어우러졌던 쿠어살롱의 공연


10시 무렵 공연이 끝났고, 싸늘한 밤길을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고 저녁을 걸렀던 우리는 숙소에서 후다닥 씻고 난 후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샤워 후 촉촉이 젖은 머리로 호로록 먹는 그 맛이라니! 컵라면은 언제나 맛있지만 여행지에서 먹으면, 외국에서 먹으면, 그리고 밤에 먹으면 열 배는 더 맛있게 느껴진다. 작은 사이즈 컵라면이어서 우리는 국물 속에 면이 더 없는지 뒤적거리며 아쉬워했다. 그날 밤은 아마도 내 인생에서 취침까지 걸리는 시간이 가장 짧은 날이었던 것 같다. 전날 새벽 두 시에 일어났던 나는, 위 내시경 수면마취할 때처럼 기억도 없이 잠들어 버렸다. 본격적으로 빈의 구석구석을 누빌 내일을 기대하며 첫날의 흥분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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