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그린델발트에 다녀와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글을 썼다. 앞선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반쪽자리 소원성취였다. 그린델발트에 대한 나의 역사를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대학교 때 스위스에 갔을 때 그린델발트 산 정상의 아름다운 호수 사진을 봤다. 어떻게든 보고 싶은 마음에 비가 오고 안개가 낀 날씨에도 불구하고 혼자 케이블카를 타고 그린델발트 정상 피르스트에 올라갔다. 내 생애 가장 짙은 안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걸음을 옮기다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내려왔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꼭 다시 와야지!' 굳게 결심.
2. 작년 스위스 언니네 갔을 때 피르스트 정상에 다시 도전. 혼자 4살 6살 두 딸내미들 끌고 가느라 고생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속에 알프스 산맥의 절경을 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 두 아이들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소원을 이루었나 싶었지만 그 호수는 한 시간을 더 하이킹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안아달라 보채는 아이들과는 불가능해 포기. 반쪽의 소원을 이루고, '나중에 남편이랑 같이 호수에 함께 가야지!' 다짐.
3. 올해 여름휴가로 스위스 언니네 가기로 결정. 나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언니가 아이를 봐주어야 한다. 언니의 아이들이 어릴 때 내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봐주었는지 과거를 소환해 간절하게 부탁. 언니가 하루 아이들을 봐주기로 합의!
작년, 두 아이와 피르스트 정상
그리고 대망의 그날이 다가왔다. 다행히 일기예보상 날씨도 좋았다. 아이들을 깨워 인사를 하고, 언니에게 잘 부탁한 후 남편과 단 둘이 차를 타고 출발했다. 집에서 그릴델발트까지 차로 2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인터라켄 근처에 왔을 때는 운전을 바꾸어주었다. 나는 작년에 조카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인터라켄을 둘러싼 호수의 절경을 감탄하며 구경했던 터라, 남편에게도 그 감동의 시간을 주고 싶었다. 인터라켄은 이름처럼 양쪽으로 호수를 끼고 있는데 인터라켄에서 왼쪽은 튠 호수, 오른쪽은 브리엔츠 호수다. 그린델발트에 가는 길은 이 두 호수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구름 없는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안개가 낀 것인지 이곳에도 미세먼지가 있는 것인지 희뿌옇게 가려져서 호수와 알프스산들의 색감도 뿌옇게 보였다. 마치 합성이나 필터를 끼운 것 같은 작년의 그 또렷한 진풍경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 아름다움을 남편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린델발트 올라가서도 이러면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하기보다는 믿기로 했다. 내가 꿈꿔왔던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둘이 손 잡고 걸어, 거울처럼 비치는 정상의 그 맑은 호수를 마주하는 장면.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는 선명한 알프스 산맥의 절경을 보며 고대했던 액티비티를 즐기는 장면.
나를 설레게 했던 피르스트의 액티비티 이미지 (jungfrau.ch)
정상 피르스트에서 내려오며 즐길 수 있는 다이내믹한 액티비티가 네 가지 있다. 작년에 아이들과 함께 갔을 때 액티비티가 설명된 브로셔를 가지고 와 살펴보며 1년 넘게 고대해 왔던 스포츠다. 첫 번째는 플라이어. 정상에서 집라인을 타고 빙하가 덮인 알프스 산맥의 절경을 보며 시속 84km로 하강한다. 두 번째는 글라이더. 독수리처럼 생긴 커다란 케이블카에 두 팔은 펼치고 다리는 몸과 수평으로, 그러니까 새가 나는 자세로 고정해 네 명이 함께 탄다. 절경을 보며 독수리처럼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역시 시속 83km로 하강한다. 셋째, 마운틴 카트. 작은 카트라이더같이 생긴 액셀 없는 삼륜차를 타고 절경을 보며 구불구불 산 중턱까지 내려온다. 넷째, 트로티 바이크. 페달 없는 자전거를 타고 산 중턱부터 그린델발트 마을을 지나 처음 케이블카를 탔던 곳까지 내려온다.
작년 봄에 갔을 때는 지금보다 더 애기 같은 딸내미 둘과 함께였으니, 호수는 물론 액티비티는 단연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익스트림 스포츠에 로망이 있는 나로서는 이것을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팸플릿의 사진과 글을 보고 또 보며 가슴에 깊이 품었다. 그리고 이번 버킷리스트 도전에 당연히 포함시켰다. 무엇보다 집라인과 독수리는 꼭! 타보리라 다짐했다. 그 둘은 티켓이 빨리 매진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최대한 아침 일찍 서둘러 갔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이미 집라인과 독수리는 매진이었다. 마운틴카트도 이미 대기가 길어서 액티비티가 하나만 포함된 케이블카 티켓만 살 수 있었다. 이건 20년까지는 아니지만 1년 넘게 마음 깊이 품어왔던 것인데. 너무너무 아쉬웠다. 우리도 아침 일찍 서둘러서 왔는데, 도대체 얼마나 일찍 와야 이걸 탈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은 어차피 집라인과 독수리는 안 타겠다고 했었으니, 따로 떨어져서 기다리고 다시 연락해서 만나며 시간 쓸 것 없이 두 손 꼭 잡고 여유롭게 호수에 다녀오면 더 좋을 수도 있다.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그치만 정상에 다가오니 집라인을 타고 소리를 지르며 절경 속으로 하강하는 사람들, 독수리 글라이더를 타고 새가 되어 하늘을 가르는 사람들을 보자 너무 부러웠다. 심지어 내가 인터라켄에서 꼭 하고 싶었던 패러글라이딩을 이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형형색색의 패러글라이드를 펼쳐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 흑. 진짜, 진심으로 부럽다! 나 여기 벌써 세 번째인데, 과연 저걸 하러 또 올 수 있을까?
정상에 도착했다. 작년에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아름다운 풍경. 그때만큼 눈이 쌓여있거나 그때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개가 많이 걷혀서 대자연의 정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그 풍경 속에서 나를 예쁘게 담아주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감사하게도 남편이 올봄부터 취미로 사진 찍기를 시작했다. 첫째 아이 낳았을 때 찍어주려고 사두었던 좋은 카메라를 (이제야) 들고 다니며 여행 가는 곳마다 인생사진을 남겨주곤 했다. 작년에 끝내주는 풍경 속에서 내가 담긴 멋진 사진 하나 남길 수 없어 무척 아쉬웠는데, 이제는 여러 포즈를 취하기 바쁘다. 나는 처음으로 챙겨본 셀카봉을 세워 남편과 투샷을 찍었다. 그리고 내가 20여 년 전 마음에 품었던 그 호수, 바흐알프제 호수가 있을 곳을 향해 손을 잡고 걸었다. 한 명씩 전담 마킹해야 하는 두 아이가 없으니 서로 손도 잡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오붓한 투샷
경사가 가파르진 않았지만 계속 오르막길이어서 힘이 들기는 했다. 한 참 온 것 같은데 시계 보면 겨우 20분 지나있고 30분이 지나있었다. 게다가 3천 미터가 넘는 꼭대기에서 알프스 산맥을 보며 걸으니 그 풍경이 너무 멋져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가느라 한참 더 오래 걸렸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자 남편은 "그냥 돌아갈까? 이미 충분히 멋진데!" 반은 농담이었겠지만 나는 발끈했다. "여보! 20년 된 내 버킷리스트가 바로 이 앞에 있어! 그냥 돌아가다니!" 나는 지친 남편의 손을 잡고 끌어주었다. 바람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오긴 했지만 '모시고' 갈 줄이야.
한 시간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낮은 언덕 주변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설마... 여기??!! 한발 두발 더 걸어가니 언덕 아래로 진짜 호수가 펼쳐졌다. "우와!!" 버킷리스트를 마주하는 감동의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더 놀라웠던 건 그 호수가 하나가 아니라 나란히 두 개가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두 호수 사이로 달려갔다. 맑은 두 호수는 거울처럼 풍경을 비춰주고 있었다. 바깥쪽 호수는 빙하로 덮인 알프스 산맥과 파란 하늘을 그대로 비추었고, 안 쪽 호수는 우리가 밟고 있는 연녹색의 산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황토색 얼룩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너네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니?! 여기서 태어나 평생 여기 산 거겠지. 이런 아름다운 대자연에서 풀을 뜯다니 행복한 얼룩소구나.
남편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남편도 좋아해 주어 다행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다니며 호수와 함께 바라본 알프스산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그 풍경 속에 나를 담아 열심히 찍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찍는 그의 모습을 찍었다. 미소 띤 얼굴로, 한쪽 눈은 찡긋 감고 한쪽 눈은 카메라에 대고 사진을 찍어주는 남편의 모습이 나는 정말 좋다. 처음 만나 연애할 때 늘 이런 표정으로 날 보며 사진을 찍어주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무척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물론 받고 있는 것이겠지?).
남편의 새로운 취미를 적극 지지합니다:)
호수에 더 가까이 내려가니 신혼부부로 보이는 한 한국인 커플이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서로 자기가 더 잘 찍었다며 알콩달콩. 한참 귀엽게 그 대화를 들으며 남편과 나는 함께 셀카를 찍었다. 이곳에 온 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20여 년 전 내가 꿈꿨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꼭 간직하고 싶어서 평소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 셀카봉을 챙겨 와 함께인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기 전 용기 내어 한국인 커플에게 말했다. "두 분 같이 하나 찍어드릴게요!" 그들은 쑥스러운 듯 감사하다며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좋은 DSLR카메라였다. 둘이 수줍게 정면만 보고 있어서 나는 셔터를 누르며 "서로 한 번 바라보세요" "뽀뽀도 한 번 하시고요" "뒤로 한 번 돌아볼까요?"라고 사진작가처럼 지시를 하며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랬더니 "저희도 찍어드릴게요"하면서 남자가 우리 카메라를 잡았다.
역시 카메라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 렌즈를 돌려 줌인 줌아웃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언덕을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각도를 바꿔가며 열과 성을 다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보세요. 잘 나왔을 거예요." 카메라를 받아보니 정말 그림처럼 예쁜 사진이었다. "우와! 사진 진짜 멋진데요!"라고 하니 그는 "저희가 쓸데없이 사진에 진심이어서"라고 웃으며 말한다. 이런 멋진 사진을 선물 받고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찍어드릴게요, 한 번만 다시 서보세요" 그리고 그가 했던 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양한 각도와 느낌으로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언제 봤고, 또 언제 또 본다고 서로 경쟁하듯 서로 잘 찍어주려는 이 사람들. 우리는 역시, 한국인이다.
합성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진들
돌아가는 길은 더욱 아름다웠다.올라올 때는 알프스산맥을 등지고 올라왔는데, 내려가는 길에는 눈높이에서 저 건너편의 빙하 덮인 뾰족뾰족한 산들을 보며 갈 수 있었다. 이 날 스위스도 이례적인 더위로 33도 넘게 올라갔는데, 3천 미터가 넘는 정상은 걷고 또 걸어도 덥지 않을 만큼 딱 시원하고 쾌적했다. 케이블카를 탔던 피르스트에 도착했다. 네 시가 되도록 점심을 챙겨 먹지 못한 우리는 이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에 앉아 소시지와 구운 감자로 간단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카푸치노도 한 잔 했다. 원래도 커피 마니아이지만 여행을 다니다 멋진 풍경 속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을 만큼 행복해진다. 작년에도 이곳에 와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이런 곳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앉았던 테이블이 눈앞에 보인다. 그때 품었던 꿈을 지금 남편과 이루고 있다니 더 바랄 게 없다. 심지어 커피까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커피라니!
이제 액티비티를 즐기며 내려갈 시간. 애초에 집라인과 독수리 글라이더는 매진이었고, 마운틴카트마저 대기 시간이 90분이나 돼서, 액티비티 중 가장 아래에 있는 트로티바이크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세 정거장 가서 내리면 탈 수 있고, 거기서 아래 마을까지 쭈욱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인적사항과 서약서를 쓰고 헬멧을 썼다. 바이크는 쉬워서인지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전해주기만 했다. 내리막길만 달리기 때문에 바이크에는 페달이 없고 양 손잡이에 브레이크만 있었다. 그리고 전동킥보드처럼 가운데 발을 두는 공간이 있었다. 달려 볼까! 하고 올라타는 순간. 헉, 무섭다. 생각보다 내리막길의 경사가 심했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서있으니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속 내리막길만 있으니 계속 브레이크를 꽈악 잡고 내려갔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속도가 제법 났다.
그렇게 5분 10분 정도 달리다 보니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고, 너무 꽉 잡아 아팠던 손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진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장엄한 산들을 눈앞에 두고 이 길을 굽이굽이 가로지르며 내려오는 느낌은, 위에서 정적으로 바라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대자연속에서 공기를 가르며 질주하는 기분. 정말 짜릿했다. 아침에 끼었던 안개는 모두 사라져 최고의 풍경을 온몸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30분 정도를 달려 아래까지 내려오자 그린델발트의 평범한 집과 마을까지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아래는 차도 많이 다녀서 각별히 조심해야 했지만, 무사히 도착지점까지 내려 헬멧과 자전거를 반납했다.
보기보다 무섭고 짜릿했던 트로티바이크
정상에 올라갔을 때는 더 짜릿한 집라인을 타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는데, 바이크를 타고 절경을 보며 대자연의 정기를 듬뿍 받고 내려오니 그 모든 아쉬움이 사라졌다. 사실 경사진 도로를 굽이굽이 내려오는 것도 꽤 무서워서 충분한 짜릿함이 있었고, 안개가 싹 걷힌 그린델발트의 풍경을 내려오는 내내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남편이 곁에 있었고, 더 바랄 게 없었다. 내가 이 날 가장 많이 했던 말 "와, 더 바랄 게 없다!"
산 정상에서 형형색색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드를 봤을 때 '익스트림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난 지금 하늘을 날고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하나마나한 부정적인 생각은 냉큼 지웠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대학생 때 꿈꿨던 그 주인공이 여보였네. 고마워. 같이 와줘서! 나 오늘 소원 이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