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미정 Sep 25. 2023

이탈리아 로마에서, 에스프레소에 마실 줄 아는 여자

마법가루가 필요해

"아 맞다! 이탈리아는 커피가 유명한 나라였지!"


아이들 없는 로마 여행에 들떠서 미리 유튜브를 보며 공부를 좀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영상이나 사진을 미리 보지 않고 현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감동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여행지를 미리 많이 찾아보지 않고 갈 때가 많다. 하지만 로마는 역사유적지가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는 겉만 훑고 올 것 같아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처음으로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을 때 그 생생한 역사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의 역사, 바티칸 시국의 탄생과 배경, 그리고 EBS 세계테마기행까지 보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명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탈리아 역사와 유적지를 살펴보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내 눈앞에 나타난 영상, "스타벅스 한 잔 값으로 로마 삼대 커피 순례하기!" 아 맞아!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커피, 그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 바로 그 이탈리아였지! 로마에 가볼 곳이 워낙 많아서 건축물과 관광지를 알아보느라 커피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삼대 커피 영상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가이드가 직접 다니며 찍은 영상이었다. 자신이 마셔본 중 가장 맛있는 곳 세 곳을 다니며 소개해주었고, 지도를 찾아보니 그중 타짜도르라는 카페는 내가 예약한 숙소 바로 근처였다.


나는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던 몰타에서 출발했고 남편은 폴란드에서 출발해 로마에서 만나기로 했던 여행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세 집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아파트를 빌려 몰타에서 한 달 살기를 했는데, 한 달 동안 공동육아를 하니 2박 3일은 아이들 두고 엄마 혼자 자유여행을 보내주자고 했다.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엄마들 모두 신이 났고, 나는 남편과 함께 갈 수 있는 주말로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어린아이들과는 함께 가기 힘들 것 같은 '로마'를 선택했다. 올해 우리는 결혼 10주년이었고, 아이들 없이 단둘이 여행, 그것도 유럽여행은 아이 낳고 처음이었다. 단 둘이 로마 여행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결혼 10주년 여행이 되겠는데!


콜로세움, 천사의 성, 천사의다리,  골목길의 작은 카페, 나보나 광장


비행기 시간이 달라 나는 점심 무렵 로마 시내에 도착했고, 남편은 저녁이 되어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 걸어가는 길에, 천사의 성, 천사의 다리, 나보나 광장, 판테온 등을 둘러보며 갔다. 엄청난 무더위에 이미 지친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잠시 쉬었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가장 궁금했던 성지, 타짜도르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조금 나가 코너를 도니 영상에서만 보던 그 간판이 있었다. 타. 짜. 도. 르.(Tazza d'Oro)!!


La Casa del Caffe Tazza d'Oro



판테온 근처에 위치한 이 커피점은 여러 사람들이 소개한 삼대 커피 중에서도 1순위로 소개되는 집이었다. 사람은 북적대고 있었지만 다행히 줄이 많이 길지는 않았다. 미리 공부해 둔 바에 의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체로 아침에 카푸치노를 마시고, 식후에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그라니타'라고 하는 커피 얼린 것에 생크림을 올린 커피도 즐겨마신다고 했다. 날도 너무 더웠고, 그라니타를 먹는 영상 속 가이드의 표정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었기 때문에 나는 첫 커피로 그라니타를 주문했다.


로마의 시스템은 좀 특이하다. 카운터에 줄을 서서 커피를 주문한다. 그러면 주문이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 영수증을 가지고 다른 쪽 바(bar)로 간다. 한쪽은 에스프레소 전용 바이고, 다른 쪽은 카푸치노, 그라니타 등 우유나 크림을 넣는 커피 전용이다. 가서 내가 가진 영수증을 보여주면 손톱으로 주욱 그어서 사용한 영수증이라는 표시를 한 후 커피를 만들어 내어 준다. 에스프레소 한 잔은 1.2유로. 이전에는 대부분 에스프레소 값이 0.8유로 정도로 1유로 넘는 곳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데, 유명한 관광지들은 값이 올랐다고 했다. 유로 환율이 역대급인 지금으로 따져도 에스프레소 한 잔에 1500원 정도다. 그러니 스타벅스 한 잔 값으로 세 잔을 마실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


우리는 카페에 쉬거나 이야기를 하러 가는 편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정말 순수하게 '커피'를 마시러 오는 듯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면 그대로 바에 서서 쭉 마시고는 잘 먹었다고 하고 간다.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테이블도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자리에 앉으면 커피값이 더 비싸다. 물론 여행하다 힘들면 테이블비를 내고 커피 한 잔 하며 천천히 쉬고 가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자리 비용을 따로 받는 것이 그리 이상하거나 억울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영수증을 보여주고 그라니타를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은 사이즈의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생크림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얼려서 으깬듯한 진한 얼음커피를 아이스크림처럼 퍼서 넣는다. 그다음 그 위에 다시 부드러운 생크림을 올려 마무리. 그리고 작은 숟가락을 꽂아 내게 건네주었다. 우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조합! 나도 이곳 사람들처럼 바에 서서 숟가락을 들었다. 위에 있는 생크림과 그 아래 있는 진한 얼음 커피를 함께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오~~ 이 달콤 쌉싸름한 맛의 조화. 커피는 아주 진하고 달고 시원했다. 마치 에스프레소 원액에 설탕을 넣어 얼렸다가 믹서기로 갈아낸 듯한, 쉽게 표현하자면 '더위사냥'의 최고급버전 같았다.


그리니타를 만들고 있는 남자와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


하지만 진짜 커피를 맛본 것은 그날이 아니었다. 다음날, 남편과 나는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서 바티칸 시국에 다녀왔다. 그 안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 성베드로 성당의 감동은 장장 네 시간 동안 줄을 서고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우린 7월 중순의 폭염 속에 너무 오래 서 있었많이 걸어 무척 지쳐있었다. 오후에 숙소에 돌아와 둘 다 샤워를 하고 에어컨 바람 속에서 가볍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태양의 열기가 한 풀 꺾였을 때 밖으로 나갔다. 맛있는 봉골레 파스타를 먹은 후 향한 곳은 어제 그 타짜도르.


초딩 입맛인 남편에게는 더위사냥 느낌의 그라니타를 권해주었고, 나는 이번엔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남편보다 하루 먼저 와 본 나는 마치 로마에 살고 있는 베테랑처럼,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영수증을 챙겨 바(bar)로 가져가 보여주었다. 어제처럼 눈치 보며 헤매지 않았다.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호록'하면 없어질 만큼 정말 정말 적은 양이다. 집에서도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에스프레소 사이즈로 내릴 때가 있는데, 그의 절반 정도 되는 양이다. 나는 가볍게 입을 대고 향을 음미했다. 향은 끝내줬고 맛은 역시 썼다. 그리고 고대했던 순간. 옆에 있는 스틱설탕을 집어 종이를 뜯은 다음 주우욱~ 그 적은 커피 속에 그 많은 설탕을 탈탈 털어 넣었다.


내가 로마 커피 영상을 봤을 때 가장 특이했던 것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가득 넣어 마신다는 점이었다. 하얀 각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살살 저어서 호로록 마시고, 아래 가라앉은 설탕액은 쭉 마시는 사람도, 남기는 사람도 있다고. 에스프레소는 왠지 쓴맛을 아는 사람만 먹을 수 있는 멋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순간 상상해 봤다. 그 진한 커피에 달달한 설탕이 듬뿍 들어간다면?? 우와, 맛있겠는데!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해봤지?


나도 설탕을 털어넣고, 함께 내어준 작은 티스푼으로 살살 저었다. 에스프레소 위에 있던 크레마가 사라지지 않고 더 부드럽게 커피를 덮었다. 드디어 기다렸던 그 순간. 에스프레소 잔을 입에 갖다 댔다. 살짝 입술을 떼서 호옥, 하고 빨아들이는 순간, 오 마이 갓!! 일단 달콤함은 둘째치고 이 집 커피, 정말 끝내준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온몸을 깨우는, 이렇게 깊고 향긋한 커피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그 진한 쓴맛을 뚫고 들어오는 달콤함이 만나 입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이 둘은 엄청난 에너지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입을 지나 위로, 위를 지나 온몸의 세포로 퍼져나간다. "크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표정을 지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궁금한 듯 "그렇게 맛있어?" "어. 우와.. 끝내줘!"


에스프레소 잔에 반의 반 밖에 차지 않는 에스프레소


삼대 커피를 소개하는 영상 속에 가이드가 설탕 가득 넣어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눈을 찡긋 감으며 "캬~"했을 때, 그 표정이 너무 진심이어서 정말 부러웠었다. 저런 감동의 커피를 맛보는 느낌은 어떨까. 그러나 나는 안다. 내 표정을 스스로 볼 순 없었지만 그 이상의 표정을 지으며 그 이상의 감동을 느꼈다는 것을. 와, 내가 그 감동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다니. 커피중독자에게 더없이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갔다. 남편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했고 나는 오후 비행기여서 혼자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다. 그렇지만 커피는 시키지 않았다. 커피는 타짜도르가 문을 열면 거기에 가서 마셔야 한다! 간단한 샌드위치에 오렌지주스를 먹고 그 카페가 문을 여는 아침 9시가 넘자 나는 천천히 걸어 타짜로르로 향했다. 아니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카운터에 줄이 너무 길었다. 이렇게 맛있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사람들에게도 소문이 많이 났는지 한국인들도 많았다. 나는 어제 너무 오래 걸어서 허리가 많이 아픈 상태였는데, 이렇게 또 오래 서서 기다릴 자신이 없어 그냥 가기로 했다.


하지만 카페를 나와 열 걸음도 채 못 가 다시 왔다. 이 커피 향을 맡은 이상 스쳐 지나갈 수가 없었고, 나중에 돌아가서 내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허리 근육을 주물러가며 버텼다. 다행히 생각보다 사람이 빨리 줄었다. 역시, 서서 호로록 마시고들 가니 회전율이 좋은 듯. 다들 테이블에 앉아서 마셔야 한다면 입장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두 잔 시켰다. 어제 너무 맛있는데 양이 너무 적어서 무척이나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장된 원두를 세 개 샀다. 공동육아로 이 자유를 내게 준 고마운 친구 엄마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커피중독자여서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았다.


삼일 연속 오니 무척 익숙했다. 영수증을 내어주니 금세 내 앞에 에스프레소를 두 잔 올려주었다. 혼자서 잔이 두 개니 살짝 부끄러웠지만, 이 감동의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나중에 생각났지만, 더블샷인 도피오를 시키면 될 일이었다). 설탕을 넣어 살살 저었다. 호로록. 호로록. 역시나 맛있다. 호로록호로록. 벌써 두 잔이 비었다. 두 잔을 먹었는데도 너무 아쉬워서 스푼을 빨고,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내게 커피를 내려준 할아버지가 일하면서 에스프레소 잔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커피를 내리면서 자기네 커피를 마시다니, 정말 이 집 커피가 맛있긴 한가보다. 그 모습이 정말 좋아 보여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할아버지랑 눈이 마주쳤다. 나는 "Do you like it?" 하며 씽긋 웃었다.


혼자서 시킨 에스프레소 두 잔과, 이른 아침 부터 길게 줄 선 관광객들


이탈리아에는 아메리카노가 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더더욱 없다. 얼마 전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짜? 왜? 그럼 뭘 마셔?? 더울 때도 뜨거운 걸 마셔?" 하면서 놀랐는데 이제는 정말 알 것 같다. 커피의 진한 맛을 아는 사람들이, 찐커피에 물을 타고 얼음을 타서 밍밍한 커피를 마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외국인이 한국 식당에 와서, "김치 좀 씻어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러면 식당주인은 김치를 씻어 내오기보다는, "매워도 먹어봐요. 이게 진짜 우리나라 김치예요"라고 하며 김치의 참맛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을까. 이들이 가진 커피에 대한 자부심, 마셔보니 알 것 같다.


로마에서 마주한 거대한 콜로세움도, 2000년의 역사를 가진 판테온도,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를 볼 수 있었던 바티칸도 정말 감동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많은 순간 중 하나만을 꼽으라면 에스프레소의 매력을 처음 느꼈던 그 순간을 선택하겠다. 그 이후 나는 에스프레소에 설탕이라는 마법가루를 넣어 달콤 쌉싸름의 진수를 어디서나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페인과 당이 한큐에 온몸으로 퍼지면 에너지도 가득 차오른다. 진심으로 커피를 애정하는 나의 커피역사는, 로마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나는 이제, 에스프레소를 마실 줄 아는 여자다.


집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설탕 한 스푼 가득 투하:)



p.s. 후에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한국의 강남, 도곡, 용산, 동탄에도 타짜도르 직영점이 생겼다. 에스프레소가 메인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도 판다는!

이전 07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비긴 어게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