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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Dec 04. 2018

나 쉬운 사람 아니예요

나 취급시 주의사항

나 쉬운 사람 아니에요     


일본 여행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곳곳에 붙어있는 주의 문구들. 어릴 적 일본에 살 때는 몰랐는데 한국에 오래 지내다 가끔씩 일본에 가면, 작은 공간마다 붙어있는 수많은 주의와 경고 문구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온천 목욕탕에 들어서면 탈의실에 “휴대전화 사용을 금합니다.”라는 문구가, 입구에 “반드시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세요.” “탕에 수건은 가지고 들어가지 마세요.”, 자리에 앉으면 “개인 자리를 맡지 마세요. 짐은 선반에 두세요. 개임 짐을 자리에 두면 직원이 선반으로 옮겨둡니다.” 옆을 보면 “머리 염색 금지.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줍니다.” 곳곳에 금지 문구가 너무 많아 편하게 온천을 즐기기도 전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일본에서 이미 기본 상식으로 지켜지고 있는 것들을, 저렇게 수많은 주의 문구로 도배해야 하는 것일까.

     

공중화장실에도 “휴지를 가져가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있다. 일본 사람도 화장실 휴지를 가져가나? “기저귀는 변기에 버리지 마십시오.” 이건 너무 상식적인 거 아니야? 전철역 에스컬레이터에는 “어린이는 보호자의 손을 잡고 탑승하세요.” “구두가 에스컬레이터에 끼일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캐리어는 손잡이를 꼭 손에 잡고 타세요.”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마세요.”라고 주의문구가 있다.      


일본은 아직도 흡연이 가능한 식당이나 카페가 많은데, 작은 카페는 “담배는 1인당 3개피만 피워주세요.”라는 아주 디테일한 안내까지 각 테이블에 놓여있다. 서점에는 “물건을 훔치는 것은 범죄입니다.”라는 문구가 강하게 적혀있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지 않을까. (물론 일본 서점의 좀도둑 행위는 서점 시장을 위협할 정도라고는 한다.)     


편히 여행하러 온 곳에서 가는 곳마다 주의와 경고문구라니, 차라리 일본어를 읽지 못했으면 더 평온한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 어쩌면 일본의 평온한 질서의 비결은 조용히 붙어있는, 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이런 ‘주의 사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국민성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화장실의 휴지를 집에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점의 책을 슬쩍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의 기질이 강해서인지, 적당히 융통성 있게 자율적으로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깐깐하게 작은 위험도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 작은 무질서도 철저하게 예방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과 ‘질서’의 힘이 아닐까 문득 느껴졌다.      


이렇게 무질서를 예방하는 작은 안내문구들이 나의 일상에도 때론 필요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존중해주지만, 꼭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 좀 사와.”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상사. “얘 옷이면 두 명은 들어가겠다.” 라고 뚱뚱한 내 콤플렉스로 농담하는 친구. “왜 아직도 결혼을 못해?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저번에 그 남자는?” 하며 꼬치꼬치 캐묻는 이모... 주변에 나를 함부로 대하는 일부 사람들이 나의 평온, 나의 자존감을 깨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      


어떻게 주의사항을 알릴 수 있을까. 너무 흥분할 것 없이, 또 너무 조심스러울 것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붙어있는 주의 문구처럼 조용히 한 마디 건네면 된다.      


상대가 약간 선을 넘는 농담을 할 때, “저 그런 농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상처가 되는 말을 했을 때 “저 생각보다 상처 잘 받아요.”

무리한 부탁을 해올 때 “이건 할 수 있지만 그것까지는 제가 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부담스럽게 캐 물을 때 “그 얘긴 이제 안 하고 싶어요. 우리 다른 이야기 할까요?”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발언을 할 때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조심했으면 좋겠어요.”

항상 자기 맘대로 이끌어가려는 사람에게 “저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고 싶어요.”     


나도 상대도 부담 없도록 자연스럽게 말하면 된다. 처음엔 용기가 필요하지만 늘 처음이 두려운 법. 나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알아야 할 안내나 주의사항을 종종 알려줄 필요가 있다. ‘깨지기 쉬우니 조심히 다루어주세요.’라고 쓰여 있는 물건 사용설명서처럼. 그러면 상대도 나를 대하는 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농담해도 되는 사람, 막말해도 받아주는 사람, 늘 부탁해도 되는 사람, 소위 ‘쉬운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초연하게 알려주자. “저 쉬운 사람 아니예요.”              




이 매거진의 글은

' 하고 싶은 말을 센스있게'

<말하기의 디테일>

의 일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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