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미정 May 13. 2019

반말해도 될까요?

거리를 좁히는 의외의 대화법


나의 장점은 예의바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던 나는 그들의 깍듯한 예의와 겸손을 몸에 익혀 돌아왔다. 아주 소소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다는 인사가 입에 배고, 별것 아닌 것에도 늘 죄송하다는 말을 붙였다. 상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하고, 누구에게든 늘 깍듯하게 존댓말을 했다.


 처음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예의 바른 덕에 무난한 직장생활을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부장님이 있었는데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까마득한 후배에게 늘 깍듯이 존댓말을 하며 정중하게 대해주셨다. 그 모습이 정말 젠틀하게 느껴지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참 좋았다. 나중에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어린 사람들에게 반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조금 늦게 입사한 후배 아나운서는 나이가 어린 작가에게 편하게 ‘예지야~’ 하며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했다. 나이가 조금 많으면 ‘언니, 언니~’ 하며 친하게 진했다. 그때 내 기준에서는 직장에서 반말을 하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꼬박꼬박 ‘작가님’이라 부르고 예의를 갖추며 그들을 존중해주려 했다.  


 다른 방송사에 이직해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누구에게든 존중하는 언어를 쓰려 노력했다. 갓 입사한 기자나 피디 후배도, 나와 오래 일한 어린 작가도, 풋내 나는 스태프에게도 말을 함부로 놓지 않고 예의바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도 서로 적당히 예의바른,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친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피디에게도 작가에게도 후배에게도 때로는 선배에게도 편하게 말을 놓는 다른 아나운서였다. 방송이 끝나면 친구처럼 이런 저런 하소연도 하고, 요청이 있으면 “이 코너 계속 하자~”라고 애교 섞어 조르기도 했다. 그때는 ‘참 친화력 좋다’라고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면 그 아나운서가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깍듯이 쓰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반말은 전혀 무례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2년 전,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무척 낯설었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한 회사의 부사장이 나에게 말을 편하게 놓자고 했다. 사회적 직급도 있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여성이 갑자기 말을 놓으라니. 갑자기 될 리가 없었다. 그러자고는 했지만 나는 어색해서 계속 어정쩡하게 존댓말을 했다. 그랬더니 자신도 말 놓기 어려워하는 성격인데, 편하게 친구 같은 사이가 되고 싶다고 하며 말을 놓으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그래, 그러자 그럼!’ 하고 받아들였다. 처음엔 참 어색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사장님과 반말이라니. ‘언니’라는 호칭도, ‘밥은 먹었어?’라는 반말도 손이 오그라들 듯 어색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은 한 번 뿐이다. 다음에 만나니 뭔가 친근함이 느껴졌다. 알고 지내던 언니 동생 같은, 혹은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같은 취미가 있는 걸 알게 돼 저녁시간에 그림 그리는 수업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부사장으로 깍듯이 모셨으면 나누지 못했을 깊은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물론 지금은 더없이 좋은 친구다.


ⓒReader's Digest

 그 일은 늘 ‘언어 표현’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해온 나에게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긍정적 표현, 부드러운 표현, 상대를 존중해주는 말’에 대해 고민하고 말은 다듬으며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말’이 주는 친화력, 한방에 벽을 허무는 엄청난 힘을 처음 느껴본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많은 도전을 했다. 사회에서 일로 만나는 사람 중에도 마음이 맞고 친구로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 말을 편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나이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생처럼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상대를 존중해주고 나 또한 정중히 대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는 ‘친밀감’이 더 갖고 싶어졌다. 그 용기 있는 도전으로 나는 소중한 친구를 몇 얻었다. 꼭 말을 놓아야만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깊이도 다르다.

 


 회사 옆자리에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나를 잘 따르고, 나와 베스트 프렌드처럼 마음을 나누던 아나운서 후배가 있었다. 내가 퇴사할 때 그녀는 예쁜 선물과 함께 편지를 적어주었다. 편지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 말이 참 예쁘고 반가웠다. 지금도 그녀가 보고 싶어 종종 전화하면 “언니~” 하면서 살갑게 전화를 받는다. ‘선배님’보다 ‘언니’라는 그 말이 참 좋다.      


 그동안 나의 깍듯한 예의와 존댓말로 사람들과 마음의 벽을 허물 기회를 잃었던 건 아닐까. 그 견고한 예의를 사람들은 높은 벽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랜 직장생활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적을 두지 않은 대신 마음 터놓을 친구도 많이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나는 아직도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동의 없이 반말하면 아직도 불쾌하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열리는 곳이라면 반말을 마음껏 허용하고 싶어졌다. 반말을 윤허하라.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니.


 



이 글은

' 하고 싶은 말을 센스있게' <말하기의 디테일>

의 일부 연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표현하기 시작하면 소소한 행복이 찾아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