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가 필요한 순간
엄마와 쇼핑을 하던 중 나는 식기를 파는 곳에서 숟가락을 찾았다.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면서 설거지거리를 좀 모아서 하다 보니 수저가 더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숟가락만 몇 개 사고 “젓가락은 이번에 일본 갈 때 사와야지.”라고 했다. 결혼할 때 선물 받은 일본식 젓가락을 계속 사용하다보니 가벼운 나무젓가락이 더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젓가락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고온의 물, 습기 등으로 장식품이 떨어져나가고 나무가 조금씩 갈라지는 현상이 있었다. 엄마가 집에 오는 날이면 “식기세척기에 젓가락 넣으면 상하니까 따로 씻어.”라고 여러 차례 잔소리를 했던 터였다.
“근데 나무젓가락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다 상하더라.”
또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젓가락만 설거지 따로 해.”
여러 차례 들었던 젓가락 잔소리가 또 등장하자 이제 나도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러려고 내가 비싼 식기세척기를 들인 게 아니야 엄마. 그것 때문에 젓가락만 일일이..”
육아에 바빠져서 좀 편하자고 식기세척기를 들였는데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서 설거지할거면 뭐 하러 비싼 식기세척기를 쓰냐 등의 논리적 반박을 하려던 참.
“하긴, 그래야 젓가락 장수도 먹고 살지.”
라며 웃으며 가볍게 넘기는 것이 아닌가.
조목조목 따져 반박하려던 나도 피식 웃으며 그냥 넘어갔다. 딸이 정색하며 그 다음에 무슨 소리를 할지 오죽 잘 아실까. 더 이상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이제 고단수가 되어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조목조목 하고 싶은 이야기를 냉정하게 해대고, 엄마는 마음이 상한 표정으로 입을 닫아버렸을 텐데. 이제 엄마는 또박또박 말대꾸 할 나의 입을 막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전환하는 노하우를 터득한 것 같았다. 엄마의 승.
위트는 반전매력이다. 진지하고 무거운 상황을 가볍게 기분 좋게 넘겨버린다. 위트는 또한 품어준다.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재미라는 그릇에 담아준다.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
영화 <베테랑>에서 “어이가 없네!”라는 유행어를 만든 배우 유아인의 인기가 절정일 때였다. 아나운서 팀에서 회식을 할 때 한 남자 선배가 후배를 가리키며 “용재, 유아인 닮지 않았어?” 그러자 동료 여자 아나운서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니예요~~~!!!” “선배 무슨 소리예요~~~!!” “말도 안돼요.”라고 심하게 야유를 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우리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나 싶던 찰나, 당사자인 후배는 “어이가 없네!”라고 받아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본인이 하지도 않은 말로 괜한 야유를 샀던 그 후배는 위트 있는 한마디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선배들의 냉혹한 야유를 여유로 품어버렸다.
위트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줄게!” 하고 시작하는 유머와는 다르다. 지금 이 상황, 이 대화의 흐름에서 맛깔 나는 양념을 치는 것이 위트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
위트가 감초역할을 할 수 있는 때는 진지한 이야기가 길어질 때이다. 별 것 아닌 것에 길게 논쟁이 이어질 때 위트 한 마디로 공기를 바꿀 수 있다. 잠시 떨어져서 보게 하는 여유를, ‘별 것도 아닌 얘기 그만하자’라는 생각의 전환을 줄 수 있다. 특히 언성이 높아질 조짐이 보인다면 그 전에 위트로 막는 것이 좋다. 위트 있게 한 마디 하려면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이 상황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젓가락 사용 논쟁에 젓가락 장수의 밥벌이를 생각했듯이 말이다.
위트가 감초역할을 할 수 있는 또 하나는 누군가 실수했을 때다. 예전에 강연회를 마치고 강연에 참여한 기업 대표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중국 요리와 와인을 즐기고 있었는데, 내가 와인 잔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만두가 담긴 접시에 와인이 쏟아졌다. 붉은 와인이 국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한 대표가 “와인에 빠진 만두가 제 맛이지! 이런 만두 어디 가서 못 먹어.” 하면서 만두를 덥석 집어 입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러게요. 저도 하나 맛 볼래요!”, “저도요!”라고 하며 만두를 하나씩 가져갔다. 와인에 빠진 만두는 그렇게 금방 동이 났다. 심지어 “와인에 찍어 먹으니 이렇게 맛있는 걸, 여태껏 몰랐네요.” 하며 맛있게 먹어 주었다.
나는 그들의 여유로운 마음이 무척 인상 깊었다. 실수로 쏟은 것을 모른 척해주거나, 냅킨을 건네거나, 조용히 닦아주는 것으로 배려를 보일 수도 있지만, 위트로 승화시켜 상대의 실수를 웃음으로 덮어 주는 그 센스가 참 고맙고 멋졌다.
위트는 고단수 커뮤니케이션이다. 불편한 상황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는 것, 상대의 예민함을 넉살 좋게 품어버리는 것, 누군가의 실수를 센스 있게 덮어주는 것이다. 나의 위트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맛본 이는 위트에 더 욕심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백 퍼센트 성공하는 타자는 없는 법. 위트가 먹히지 않거나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상황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3할만 쳐도 훌륭한 타자라 하지 않나. 위트가 필요한 순간에 주저 말고 방망이를 휘둘러보자. 내 말에 상대가 웃는 기쁨을 맛보면 종종 홈런도 치게 될 것이다.
유머는 인생의 충격 흡수장치이다.
- 페기 누난
이 매거진의 글은
도서 <말하기의 디테일>의 일부 연재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 책에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