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살아남는 법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모든 걸 체념하면 모순적이게도 다시 힘이 조금 생긴다. 그간 잘 지냈냐는 친구의 안부에 “아니, 나 죽었었어. 근데 다 포기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힘이 조금 나더라?”라고 이야기를 하니, “그게 바로 부활이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데 왠지 정말 그런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강의가 모두 취소된 것도 괜찮았다. 돈을 못 버는 것도 괜찮았다. 육아로 대학원을 한 학기 더 휴학해야 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늘 내 손이 필요한 8개월 아기와 청개구리 행동이 발동하기 시작하는 네 살 아이. 이 둘을 내가 24시간 X 무기한으로 돌봐야 하는 건 괜찮지 않았다. 가끔 도움을 주던 친정엄마 마저 자가격리가 되어 꼼짝없이 독박 육아가 시작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출퇴근이 없는 육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의 상실, 분노, 인격파탄, 밑바닥 치기... 그렇게 한 달 반을 넘기고 모든 상황과 나의 모습에 좌절하고 나서 모든 것을 버렸다. 앞으로에 대한 기대나 계획, 희망, 힘을 내고자 하는 마음까지. 그랬더니 오히려 아주 가끔씩 행복한 순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해맑게 웃는 둘째의 목덜미에 뽀뽀하며 아기 냄새에 더없이 행복해지고, 코뽀뽀를 하자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보드라운 코를 들이대는 첫째의 얼굴을 마구 부비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 이 순간. 오늘은 이거 하나면 됐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예쁜 딸이 웬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그냥 그거 하나로 된 걸로.
하루에 하나만 찾아보자. 그건 할 수 있겠지?
4월 7일 화요일. <양귀비와 메리골드>
꽃을 사러 갔다. 생각보다 모종이 비싸 많이는 못 사고, 봉오리 가득 머금은 양귀비 4개와 노랗고 커다란 메리골드를 3개 샀다. 돌아와 화단에 심었다. 늘 엄마가 사다 심어주면 물만 주었었는데, 내가 직접 흙을 고르고 파서 심으니 더 내 새끼같이 정이 간다. 우리집 테라스에도 봄이 느껴진다!
4월 8일 수요일. <상추 선물>
아이와 상추를 심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상추 심기 행사를 하려다 코로나 때문에 못 하고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어준 모양이다. 현관 앞에 선물처럼 놓여있던 작은 상추 모종 6개를, 어제 꽃을 심었던 옆 화단에 나란히 심었다. 요즈음 밖에 잘 나가지도 못하고 장을 보기도 쉽지 않아서 ‘우리도 상추나 사서 심어볼까?’ 생각했던 참이었는데 신기하게 딱 맞추어 들어온 상추 선물. 고사리 손 같은 아이손으로 직접 심게 도와주고 물도 듬뿍 주었다.
4월 9일 목요일. <벚꽃비를 맞으며>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에 나섰다. 얼마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쌍둥이 유모차 덕분에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다행히 집 주변이 산과 숲을 품은 곳이라 밖에 나오면 숨통이 트인다. 벚꽃이 활짝 핀 천 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 벚꽃비를 맞았다. 첫째는 좋아하며 꽃잎을 잡으려 한다. 둘째는 그저 뻥튀기를 열심히 먹고 있다. 울지만 않아도 감사하지.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 길이라 땀이 삐질 났지만, 파란 하늘에 분홍 꽃비, 이걸로 오늘은 행복!
4월 10일 금요일 <나를 위한 밥 한 끼>
아이가 잠들어, 안 하던 요리를 했다. 된장찌개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어 어제 재료를 사두었는데 마침 이때다 싶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조용조용, 황태육수를 우리고 양파, 애호박, 양송이버섯, 두부를 깍둑깍둑 썰었다. 구수한 된장을 풀고 콩비지를 넣고 청국장 한 숟가락에 새콤하게 잘 익은 김치까지 팍팍 투하!
내가 딱 원하던 그 맛. 콩비지와 김치와 된장과 청국장이 모두 들어간, 깊고 구수하고 얼큰한 이 맛. 아이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테라스로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가 심어놓은 꽃들을 바라보며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했다. 행복... 하다! 오늘 나를 위한 정성스러운 밥 한 끼. 이거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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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토요일 <하늘 품은 커피 한 잔>
어제 비가 내린 후 파란 하늘의 토요일.
남편은 첫째를 데리고 나가고 아가와 둘이 남았다. 맘 같아서는 호수공원이며 책방이며 맘껏 돌아다니고 싶지만,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나가기가 아직 조심스럽다.
아기가 잠든 사이 조용히 방에 들어가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 테라스로 나왔다. 향긋한 이디오피아를 내려 잔에 따르는데, 잔을 채우고 보니 커피에 뭉게구름 가득한 하늘이 비치고 있다. 커피 한 잔 마시려다 예쁜 하늘까지 덤으로 얻은 기분.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면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실 시간이 없다. 그래서 마음먹고 원두를 사두어도 결국 못 먹고 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원두를 직접 갈아 한 방울씩 내려 마시는 건 그래서 나에게 의미가 있다. 잠시 나를 위한 여유를 갖는다는 것,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떼어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더 특별하다.
첫째를 데리고 놀러 나간 남편에게, 즐겁게 아빠를 따라나선 아이에게, 이 시간 고이 잠들어준 둘째에게, 그리고 맛있는 커피를 정성스럽게 내려준 나에게 감사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