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해야 하는 서른 아홉

내가 다시 팔릴 수 있을까

by 강미정

며칠 전, 예전에 같이 일했던 피디에게 연락이 왔다. 퇴사 전 인터뷰 프로그램을 할 때 같이 다니던 외주제작사의 피디였는데 편안하고 마음이 잘 맞아 즐겁게 일하던 분이었다. 퇴사 후, 출산 후에도 종종 전화가 와서 “같이 방송합시다!”라며 재미있는 제안을 주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피디님~ 저 이제 방송 재미 없어요.”라고 답하곤 했었다. 그리고 다른 아나운서를 연결해주었다.


내가 안 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혹시 주변에 보험방송 잘 진행할 수 있는 아나운서 있어요?”라며 소개해달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방송 할 것도 아니면서 살짝 서운했다. “지금 아나운서도 잘하긴 하는데, 미혼이고, 배우자도 자녀도 없다보니까, 보험 전문가들이랑 주고받고 할 때 이야깃거리가 좀 약해서. 30대면 좋겠고, 결혼하고, 자녀도 있으면 더 좋고...” 그러더니 “그냥 미정씨가 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 내심 반가웠다. 전에는 딱 잘라서 방송은 안한다고 했는데, 뭔가 살짝 하고 싶다. 아마 코로나로 일이 뚝 끊어지면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많이 낮아져있던 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 그래요? 내가 할까?? 뭔가 좀 하고 싶네요?” 그랬더니 “그래, 같이 해요! 미정씨가 딱이지! 방송 한번 봐봐요.” 그래서 “네 피디님, 방송 보고 생각해보고 전화드릴게요!”하고 끊었다.


더 재미있는 건 그 외주 제작사의 피디가 그 방송을 하고 있는 곳이 내 전 직장인 OBS다. 만일 하게 된다면 전 직장으로 녹화 하러 가게 된다. 그러면 늘 보고싶던 아나운서 동료들을 정기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그냥도 만나러 갈만큼 애틋한 사람들인데, 심지어 가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전혀 관심 없는 ‘보험방송’이지만, 몇 개월 전만 해도 안하겠다 했을 방송이지만, 지금은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더구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던 요즈음이다.

피디가 이야기한 방송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MC가 너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잘하는 걸? 도대체 왜 바꾸려는 거지? 과연 내가 저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세어보니 방송 떠난지 벌써 4년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면 할 수 있겠지? 나는 진로를 바꾸었지만, 아직 방송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수입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야? 위클리 방송이여서 일정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도 물어보니 “해봐”라고 하길래. 고민고민 끝에 결정해서 피디에게 전화를 했다.


“피디님! 제가 할게요!”

쏘쿨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피디 왈

“잘 생각했어요. 근데 최종결정은 협찬사에서 해요. 거절할 수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늘 자사 아나운서로 주어진 방송만 하다보니, 협찬사가 MC를 결정하는 구조를 깜빡했던 것.

“프로필 있으면 하나 보내주세요”

라고 하기에 그동안 만들어두었던 아나운서 프로필과, 웹상에 있는 나의 프로필 홈피도 같이 보내드렸다.

그런데 조금 있다 문자가 왔다.

“미정씨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39요”


내 나이를 쓰고 스스로 깜짝 놀랐던 문자

답장을 쓰고 보니, 내 나이가 너무 많다. 정말 너무 많다. 굳이 39, 이제 마흔이 되는 아나운서를 MC로 쓸 이유가 있을까. 내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별로 없다. 사실 MC가 경험이 많으면 좋지만 그걸 이유로 나이 많고 덜 예쁜 사람을 쓸 이유도 없다. 능력있는 MC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에 거절당할 수도 있겠다고, 미리 마음을 먹었다.

다음날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협찬사에서 미정씨 유튜브에 나온 영상 보고, 좀 통통하다고... 그거 출산하고 얼마 안 돼서 찍은 영상이죠? 날짜 보니까 그렇던데.”


아뿔싸. 실수다. 아무 생각없이 프로필 홈페이지 만들어둔 게 있어 자랑스럽게 보냈는데, 거기 링크에 인터뷰 몇 개를 올려두었다. 그 중 하나가 작년 출산 직후에 취업면접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해와서 촬영했던 영상이었다. 요즈음은 방송보다 강의를 다니기 때문에 사실 외모가 중요하지 않아 나의 활동 영상들을 볼 수 있게 해두었는데, 하필 그게 거기에.. 아무 검열 없이 프로필 홈페이지를 굳이 보낸 내 잘못이다.


문제의 영상 (이것도 출산하고 엄청 뺀 건데 ㅠㅠ)


“출산 후에 찍은 거여서 부어있는 거라고 내가 얘기는 했어요. 그리고 OBS에서도 방송도 잘하고 앵커도 했었기 때문에 시청자들한테도 매리트가 있을 거라고 얘기해 뒀어요. 근데 아무튼 방송 영상 하나만 찍어서 보내달래. 내가 원고 보내줄 테니까 그냥 핸드폰으로 짧게 하나 찍어서 보내줘요!”

“네!” 하고 경쾌하게 대답하고 끊었지만 나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 방송을 하기 위해 나를 증명해야 하는 때가 왔구나. 나이도 많고, 영상까지 찍어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더 싫었던 건 ‘참나, 까짓거 찍어서 보내주지’라는 자신있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시 휴대폰의 카메라를 켜서 내 얼굴을 봤다. 분장을 하지 않고는 평범한 얼굴. 출산으로 인한 붓기는 빠졌지만 방송하기엔 내눈에도 좀 통통해보인다. 메이크업 헤어, 스튜디오 조명도 없이 휴대폰으로 찍어 내가 적합한 MC라고 증명해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방송도 아닌데 굳이 ‘내가 촬영까지 해서 보내줘야해?’ ‘그 시간에 그냥 글이나 더 열심히 써서 나의 콘텐츠와 나의 책을 만들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진짜 하기 싫어서야? 아니면 애썼는데도 안 될까봐 두려워서야?’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아나운서로 방송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 해보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도 들고 ‘이거 하기로 하면, 어떻게든 다이어트를 하게 될테니 꼭 도전해보자’ 뭐 이런 생각도 든다.


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다. 코로나와 육아 등 여러 상황으로 일을 하기가 어려워진 요즈음, 방송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없이 감사한 일이고, 전 직장에 가서 반가운 얼굴을 자주 볼 수 있고, 방송을 이유로 자기관리를 더 잘하고 싶기도 했다. 육아가 메인인 지금, 방송국에 가서 다시 메이크업을 받고 조명을 받고 하면 기분전환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간에서 피디가 그렇게 애써줬는데, 내가 안한다고 포기해버리면 피디 입장이 난처해지고 나도 미안할 것 같았다. ‘그래, 그 쪽에서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뭐 크게 아쉬울 것도 없으니, 일단 잘 찍어보자!’

혼자서 카메라, 조명 세팅, 녹음 체크


적당히 분 몸매와 통통해진 얼굴, 늘어난 표정주름들을 감추려면 많은 것이 필요했다. 일단 화장을 열심히 했다. 퇴사한 후로 붙여 본 적이 거의 없는 속눈썹도 붙였다. 불편해서 입지 않는 꽉 끼는 원피스도 꺼냈다. 작업실에 와서 스탠드 조명과, 제품 조명 다 모아서 켰다. 어떤 앵글에서 더 갸름하게 나오는지 각도를 여러번 바꿔 테스트했다. 머리를 푸는 게 얼굴이 더 작아보일지, 머리를 묶는 게 더 작아 보이는지, 결국 두 가지의 버전으로 다 촬영을 했다.


그렇게 좀 신경을 쓰니 확실이 조금 더 날씬해보이고, 얼굴은 조금 더 작아보인다. 오~ 아직 죽지 않았어! 혼자 피식 웃으며 녹화를 시작했다. 톡톡 튀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해서 목소리 톤을 한 껏 올려서 했다. 찍고 또 찍고, 모니터하고 또 찍어보고.


뭔가 열심히 하고 나니 방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세졌다. 방송 원고를 읽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진짜로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연습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일단 찍어보자’라는 마음에서 ‘진짜 하고싶다’라는 마음으로 바뀌는 게 참 재미있다. 그것도 내가 정말 하기 싫어했던 ‘보험방송’을...!

다 찍고 나니 무척 피곤하다. 왔다갔다 하며 자리 세팅, 조명세팅하고, 허리 꼿꼿이 세워 긴시간 촬영하고 나니 허리가 너무 아프고 배도 고프다. 그런데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오늘 깨달았다. 할까 말까 슬쩍 고민하던 것도 일단 시작하고, 조금 더 열심히 하다 본면 어디선가 에너지가 나오고 뭔가 간절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재미있어진다는 것을.


실제로 샘플녹화했던 영상 캡쳐 :)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의 경중을 따지고, 나의 이미지를 따지고, 수입을 따지고, 조금 까다로웠던 나였는데, 무엇이든 해보려는 마음, 더 늦기 전에 다시 도전해보려는 마음, 기회를 감사히 여기는 마음... 이전 보다 조금 더 낮아진 마음을 갖게 되어 참 좋다. 조금 더 낮아진 내가 더 좋다. 이제 곧 마흔. 삶이 더 즐거워질 것 같다:)



덧, 그 후 며칠 뒤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첫마디가 "미안해서 어쩌지".

그런데 왠지 마음이 한결 편했다. 방송을 다시 하려니 부담이 컸나보다.

대신, 샘플 녹화를 하면서 아주 좋은 팁을 얻은 덕분에

지금 나는 나의 유튜브 채널을 즐겁게 준비하고 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로나 속 행복 찾기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