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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Sep 20. 2022

딱 3년만 다른 사람으로

남편 찬스


"폴란드 지사 이야기가 나와서"


기다렸던 바였다. 해외 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는 우리는 이전부터 해외지사 발령을 꿈꾸면서,


"미국이 좋을까, 베트남이 좋을까?"

"베트남도 좋을 것 같은데?"

"튀니지도 있어. 아프리카이긴 해도 바로 지중해랑 유럽이 가까워"

"오, 여기도 좋겠다."


라며 구글 지도를 보고 결혼 초기부터 김칫국을 마시던 우리였다.


하지만 그때는 발령받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몇 년 후에는 두 아이를 두 해 간격으로 낳아 임신, 출산, 육아 X 2를 반복하며 보내준다 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엄마 없는 해외생활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폴란드 지사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은 아이들이 다섯 살, 세 살이던 작년이었다. 아직도 버거운 나이긴 하지만 훗날로 미루었다가는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오, 폴란드??! 폴란드가 어디쯤이지?"


독일이나 프랑스, 스위스 등에 비해 정확히 위치를 몰랐던 나는 물었고, 남편이 구글 지도로 보여주었다.


"여기가 우리 회사고, 여기 브로츠와프에 국제학교랑 한인들 많이 사는 동네가 있대."


지도를 보는 순간, '어머 내 동유럽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서쪽에 독일과 체코 국경이 맞닿아있었고, 그 아래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가 펼쳐져있었다. 운전하면 드레스덴까지 2시간 반, 프라하까지 3시간 반, 베를린까지 4시간, 빈까지 5시간, 스위스에 사는 친언니 집까지 10시간, 혹은 비행기 타면 한 시간 반이면 닿을 곳이었다. 나의 로망인 프랑스 파리도 보였다.

'어머 여긴 가야 해!!'



지도도 보고 유튜브도 찾아보았다. 아름다운 유럽 풍경. 그동안 코로나와 육아에 갇혀 몇 년간 해외여행을 못했던 터라 그 풍경에 가보고 싶은, 그곳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절실해졌다.


사실 처음에는 폴란드어를 모르고 육아가 걱정되어 잠시 망설였다. 나도 언어를 모르는데 아이들 선생님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학교가 있었고,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한 곳에서 다닐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었다. 나도 영어는 가능했고, 한국에서는 욕심도 없지만 돈도 없어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못하는데, 회사의 교육비 지원으로 아이들이 국제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더더욱 감사할 일이었다.


"지원해! 가고 싶다고 말씀드려!"


그 후 나는 남편이 올 때마다, "팀장님이 별말씀 없었어?" "상무님은 뭐라셔?" 라며 결과를 궁금해했다. 매일 애를 태우며 기다리다, 3개월 후에 확정이 되었다. 우리는 축배를 들었고, 나는 다시 구글 지도로 스트리트 뷰를 살펴보며 그곳에 있을 나를 상상했다.


사실 남편이 주재원으로 지원하고 발령을 받아 함께 간다는 것은, 나의 커리어를 잠시 내려놓는 것을 뜻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뜻을 품고 10여 년 간 아나운서로 몸 담았던 방송국을 퇴사하고 상담심리 대학원에 입학했고, 바로 아이가 생겨 휴학했다. 아이를 뱃속에 품고 첫 번째 책을 출간했고, 첫째를 조금 키워놓고 대학원에 복학하고 두 번째 책을 출간할 때 둘째가 태어났다. 자식 같은 책이 나와도, 진짜 자식이 같이 태어나니 출간기념회고 뭐고 없었다. 그러니 뭐 좀 하려 하면 '임신+출산+육아' 패키지로 인해 늘 제자리였다. 그 참에 코로나 까지 더해져서 어린이집 폐쇄에 독박 육아를 하며 우울에 빠지기도 했다.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간간히 강의와 코칭을 했고, 힘겹게 대학원도 복학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겨우 둘째도 어린이집을 보낼 나이가 되고 대학원도 겨우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이제 좀 활동을 해볼까 하던 참에 해외 살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성취욕도 인정 욕구도 많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놀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세상에 호기심이 많으며, 여행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했다. 굳이 비율로 표현하자면 3:7 정도 될 것 같다. '자유'는 나를 나로 살게 하는 아이덴티티와 같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인정해주었던 아나운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홀로서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방송국 퇴사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었다. 시간에 얽매이던 삶에서 시간의 주인으로 바뀐 것이 그저 뿌듯하고 즐거웠다. 이런 나이니 커리어에 대한 중단보다는 유럽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먼저 상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 3년 한 번 실컷 놀아보자.

노는 걸 좋아하는 나이면서도 성취욕도 많은 나여서,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고, 책 쓰고, 유튜브 만들고, 강의를 다니며 한시도 마음껏 쉬어보지 못한 나였다. 한창 육아하는 중에도 속시원히 일을 놓지 못했고, 아이들에게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늘 쫓기듯, 밀린 숙제 하듯, 숙제가 없으면 예습이라도 하듯 살아온 나였다. 나의 7할인 자유로운 영혼을 따라 잠시만 신나게 놀아보면 어떨까. 

'딱 3년만, 불안과 욕심과 의무, 모든 것을 내려놓아 볼까? 아이들이 한창 귀엽고 엄마 손이 필요한 때,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해볼까?  잠시만 아내로, 엄마로, 신나는 여행자로 살아볼까?'


주재원 아내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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