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용 『카페 프란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난 동기들을 싫어했다. 전라도의 작은 지방에서만 지냈던 난, 다른 지역 친구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다들 분명 재밌고 흥미로운 사람들로 가득할 거야. 하지만 이 같잖은 기대는 봄이 오기 전에 3월의 마지막 눈과 함께 녹아내렸다. 몇몇은 이기적이었다. 남을 배려할 줄 몰랐다. 몇몇은 무례했으며 몇몇은 허세가 심했다. 그중에 가장 짜증 나는 애들은 패배주의에 찌든 애들이었다. 서울권의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수능을 망쳤다나. 전공을 살리고 싶어 왔는데 후회한다나. 못 들어줄 정도로 한심한 대화로 술잔을 채우는 애들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동기 중에 적어도 수십이 그랬고 난 걔들을 전부 싫어했다. 물론 겉으론 절대 표현하거나 뒷담화를 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그들을 싫어함에 있어 죄책감도 없었다. 내 감정을 허락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친한 친구에게 이 말을 털어놓으니 그가 말했다. "마음 놓고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건 멋진 거야."
누구나 그렇듯 스무 살에 꾸던 꿈들을 하나씩 정리해갔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건 기약이 없으니 미루고, 직업으로 가지고 싶었던 건 재능이 없으면 돈벌이 안 된다니까 미루고, 배워보고 싶었던 건 돈이 없어 미루고. 뭐 그렇게. 미뤄두고 나중엔 하겠다는 변명을 대며 하나씩 포기해가는 게 내겐 나이 듦이었다. 그렇게 상상으로만 즐기는 꿈들이 많아지니, 난 어느새 스물다섯이 됐다.
20대의 중반이었고, 동생들이 많아졌다. 이젠 무언가 잘 하는 게 있어야 하는 나이였고 꿈보다 현실적인 사람이어야 하는 나이였다. 내가 꿈꾸던 그림은 그냥 환상임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였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에 좋아하는 카페에 홀로 가서 앉아 커피를 시켰다. 내리는 비를 보며 내가 포기했던 것들을 일기장에 적어내렸다. 그러다 창피하게도 울었다. 그런데도 엉엉 울지는 못했다. 왜 그랬지. 말을 먼저 걸어보고 싶었지만 쑥스러워 친해지지 못한 사장님이 날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봐서 그랬으려나. 아님 스물다섯 남자가 혼자 처량하게 울고 있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뭐라 생각할까 창피하니 그랬으려나. 어쨌든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내 흑역사로 남아있었다.
정지용의 카페 프란스는 그 처량함이 나랑 닮았다. 옛날에 어떤 비평을 본 적 있다.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지 않았거나 결사적인 저항 문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저항 문학가로 보기 힘들다는 그런. 뭐 이제 와서야 케케묵은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다만 적어도 너무 작은 소시민인 내게 정지용은 멋지다. 카페 프란스를 읽으면 홀로 처량히 카페에 앉아 한숨을 쉬며 글을 적었을 그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그의 일기장은 얼마나 젖었을까. 얼마나 많은 욕구들을 맘 속에 꽉꽉 눌러놨을까. 본인의 현실과 이상.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거기에 아파했을까. 이 시를 다 읽고 오래 전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음 놓고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건 멋진 거야." 시원하게 표현하기 힘든 그 감정들을 글에 꾹꾹 담아 표현했음이, 어지럽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글을 썼음이, 본인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것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그날의 일기장을 넘겨보았다. 볼 때마다 마음 아픈 부분이다 정말. 그래도 이 글을 마무리하며 몇 가지는 알게 됐다. 그때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아무한테도 하지 못했던 말을 글로 적어내리니 시원해서 그랬을 거라는 확신.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것. 포기한 것들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맘 놓고 부끄러워하자는 다짐. 그걸 글로 표현해보자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더 늦기 전에 해보자는 것. 뭐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