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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n 20. 2019

기억과 그 속의 사람들에게 기대곤 해요

-     백석 『두보나 이백같이』

난 스무 살 때, 선배들을 전부 다 싫어했다. 죄다 이기적이고 권위적이고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선배'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나보다 더 빨리 걸어서 내가 걷는 길을 미리 걸어본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선배를 찾기란 힘들었고 그런 존재란 하나의 환상으로 남는듯했다. 


교내 학보사에서 일을 하다가 나왔다. 언론사 특유의 정치질과 파벌, 이해되지 않는 구체제적 관습에 이골이 나서 나왔다. 그러다가 한 중앙 동아리를 들어갔다. ‘하고 싶은 건 전부 기획해서 해볼 수 있는 프로젝트 동아리라고? 흥미롭네.’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동아리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선배도 있었고 기댈 수 있는 친구들도 있었고 내가 실수할 수 있는 기회도 존재했다. 그 사람들과는 밤이 되면 술을 마시고 자주 학교 운동장을 산책했다. 서로의 고민을 말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며 어떤 어른이 될지 이야기했다. 그러다 다리가 욱신거려오면 운동장 가운데 누워 밤하늘을 봤다. 별자리를 보는 법도 모르지만 별이 이쁘다고 그렇게 하나하나 세었다. 


어느새 그 친구들은 전부 직장인이 됐다. 파란 밤 별이 세어지던 나이를 지나 다들 하나씩 책임이 무거워졌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게 더 많은 시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루는 밤하늘 산책하던 그때에 대해 말하다가 선배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때 전강산 되게 신기했는데. 겨우 스물한 살 된 애가 뭐 그렇게 생각이 많은지. 고집은 또 엄청 세고. 그런데 이야기가 잘 통해서 타협할 줄도 알고. 네가 우리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많이 성장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도 널 만나서 다행이었어. 우린 그때 서로 성장한 거야.”


백석의 시를 읽고 난 이 날의 일이 떠올랐다. 타지에서 과거의 존재를 생각하며 먼 고향을 떠올리는 그의 모습에 왜 난 그 선배가, 그 친구들이, 지금은 없어져버린 그 동아리가, 밤하늘 세던 그때가 떠올랐을까? 지금쯤 고향이었다면 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었을 거라는 그의 말에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위안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 나의 짐을 상대방에게 덜어내는 거 같아 타인에게 기대기 힘들다는 동기의 말에, ‘의존과 의지는 달라. 의존하지 않는다면 남에게 의지해도 좋아. 더 많은 것을 그 사람과 나누는 거잖아.’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형체를 잡을 수도 없는 그날의 기억들에 의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백석도 형체도 알 수 없는 두보와 이백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지난 기억에 기대고 위안 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돌아갈 수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면 돌아오는 건 오히려 괴로움이었을 테니까.


실체가 없는 괴로움이 있다. 남에게 털어놓기도 조금 창피한 괴로움도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게 있다. 다른 나라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맘도 그랬을 거 같다. 본인의 선택으로 간 유학이지만 그 나라의 옛 존재에게 기대며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을 위로 받고자 하는 것. 조금 창피하지만 나도 백석처럼 지난 기억에 좀 의지하고자 한다. 


지난 기억에, 그 기억 속 사람들이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존재하기에. 나도 백석처럼 그날들과 그 사람들을 추억하는 글이나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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