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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l 10. 2019

나는 우리 엄마가 불쌍하다

그렇기에 남은 그녀의 인생을 축복한다

그녀는 1962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4명의 오빠를 둔 막내딸. 그녀의 유년기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집안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오빠들은 엄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 6시가 넘어서 귀가하면 여차 없이 맞았다. 이유는 ‘여자가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오빠들은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어째서 자신만 통금 시간이 있어야 하는지, 불편했지만 혼나지 않기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


그녀가 고등학생 때,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탱크를 끌고 쳐들어왔다. 거리에는 새소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닌, 총성으로 뒤덮였다. 그녀의 오빠들은 시위를 했다. 그런 그녀의 오빠를 어디다 숨겼냐고, 한 군인이 들어와 총검을 들이대며 그녀와 그녀의 부모를 협박했다. 그 군인은 총으로 그녀의 집 다락방을 뒤졌고, 다행히도 그녀의 오빠를 찾지는 못했다. 밖에서 들리는 총소리 때문에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집에만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대학시험을 치르고 친구들과 목포로 여행을 갔다. 그때 불량해 보이는 그와 그의 친구 무리와 만났다. 그 남자들은 함께 놀자며 그녀와 친구들에게 접근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신나 보였지만 그녀는 싫었다. 그녀는 광주 행 버스에 몰래 탔다. 그러자 그녀가 없어진 걸 안 그는 근처 버스 안을 뒤졌다. 기사가 그를 말렸지만, 사람을 찾는다며 그는 그녀를 찾아댔다. 그녀는 그를 보고 무서워서 엎드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다행히도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렇게 그녀는 광주로 도망쳤다.


그녀는 재수를 결심했다.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를 하다, 어느 날은 친구들이 불러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그녀는 그를 마주쳤다. 그는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고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녀는 그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겼다. 같이 밥 먹자고, 같이 영화 보자고, 같이 술 마시자고 그녀를 귀찮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겁탈을 당했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죄인이었다. 여자가 순결을 잃으면 끝이라는 집안의 의견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골 출신이자 농부의 막내아들이었으며, 가난한 대학생이라 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조그만 자취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한 몸이었지만 좁은 그의 자취방에서 지내며 하루에 한 끼, 그것도 라면으로만 버텼다. 그리고 그는 군에 입대했다. 그녀는 홀로 시부모를 찾아가 아이를 낳았다.


낳은 아기는 딸이었다. 그 아기는 낮에는 새근새근 자고, 밤에 울어댔다. 덕분에 그녀는 낮에 시부모를 도와 논, 밭 일을 돕고 밤엔 아기를 봐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건강이 나빠졌다. 아기는 커서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됐고, 그녀는 친정에 돌아가 용서받았다. 그녀의 잘못은 ‘순결을 잃은 죄’였다. 성범죄의 피해자였지만 그녀의 집안은 여자가 순결을 잃으면 무조건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제대한 그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그와 그녀의 결혼사진엔 큰 딸이 있다.


그녀의 시부모는 손자를 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낳고 싶지 않았지만 시부모는 우리 아들 대를 끊어놓을 것이냐며 그녀를 다그쳤다. 그렇게 그녀는 또 딸을 낳았다. 힘들게 출산을 했지만 그녀의 시엄마는 또 딸이냐며 눈길도 주지 않고 병실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뒤이어 갖게 된 아이도 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더 이상 아이를 기를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도 여자인 딸을 크게 반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복중의 아이를 지울까 고민했다. 그때 배 안의 아이가 그녀의 배를 발로 찼다. 그녀는 그런 딸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셋째 딸을 낳았다. 아들을 낳으라는 시댁의 압박은 그치질 않았다. 그도 아들을 원했다. 그렇게 그녀는 네 번째의 임신을 했고 다행히도 아들이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더웠던 94년의 8월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네 명이나 되니 그녀의 삶은 더욱 피곤해졌다. 한 아이는 학교를 나가지 않고 음악만 들으며 마음을 닫아버렸고, 한 아이는 학교에서 학교폭력에 연루돼 ‘일진’ 딱지를 붙이고 다녔다. 나머지 아이들도 크고 작은 속을 썩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녀의 바람대로 그들은 전부 수도권으로 대학을 갔다. 네 명의 자식을 서울로 보낸 그녀는 시골에서 성공신화였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그녀는 돈 많고 자식 성공시킨 사모님 대우를 받았다.


그쯤 되자 시부모가 아프기 시작했다. 죽어도 병원과 요양원은 가지 않으려는 그들 때문에, 그녀는 매일 같이 그들의 수발을 들어야 했다. 자식들 키워놓으니 이제 시부모 뒤처리를 하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충격으로 시어머니는 치매가 왔다. 그는 절대로 그의 엄마를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자식들의 원성으로 그의 어머니를 결국 요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고 그는 나의 아버지다. 그리고 난 그녀를 괴롭힌 그녀의 막내아들이다. 난 어느 날부터, 가족들 때문에 평생을 희생한 엄마의 꿈이 궁금했다. 엄마는 의류에도 관심이 많고 요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멋진 직업을 가져서 자기 스스로 돈 벌고 혼자 잘 사는 그런 삶을 꿈꾼다.


난 그런 엄마의 말이 아프다. 엄마는 진로를 고민할 시간도, 꿈을 꿀 여유도 없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만 했다. 언젠가 엄마랑 단 둘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엄마는 우리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을까?

엄마는 돈도 안 벌었고, 배운 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너희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일까?”


난 이런 엄마가 눈물 나게 불쌍하다. 자신의 삶을 존경스러웠다 자부하지 못하는 시간을 버텨야만 했던, 엄마의 그 삶이 너무 애처롭다. 그리고 난 대답했다.


“엄마, 단 한 번도 엄마를 존경하지 않은 적이 없어. 엄마는 엄마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걸 이뤘어.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행복하고 행운이었어.”


이렇게 말하며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유난히도 엄마를 닮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는 분명 이루고자 했던 많은 꿈들을 묻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감히 말하고 싶었다. 이루고자 했던 걸 전부 이뤘다고. 그렇게라도 엄마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엄마는 자부할 정도로 존경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난 엄마의 남은 인생을 축복한다. 엄마가 하고 싶었던 걸 전부 해나갔으면 좋겠다. 더 이상 시댁 눈치, 자식 걱정하지 말고, 멀리 꿈꾸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엄마 인생의 동반자로서 남은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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