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준비했던 SBS 드라마PD 시험에서 결국 떨어졌다. 같이 준비하던 스터디 멤버들 중 한 명만 붙고, 전부 탈락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더 친했던 멤버들과 술을 마시며 한탄을 하고는 했다.
"월급이 없는 지금의 삶이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내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응, 그래도 이 힘듦을 섣불리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괴롭긴 하네."
다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린 이태원의 언덕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고, 날씨는 선선했다. 여름이 가고 조금씩 가을이 오는 듯했다.
난 그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내 선선해진 날씨를 느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것들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팔에 닿는 바람, 기관지까지 시원해지는 공기, 자동차 속도에 흔들리는 가로수 소리, 술 취한 채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사람의 통화.
평화로웠다. 그런데 내 마음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꿈이 좌절됐고, 잔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기대는 여전했으며, 난 그대로였다. 날씨는 선선하게 바뀌어갔지만 난 또다시, 그대로였다. 바뀐 것 없이.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았지만 익숙하게 울음을 잘 참았다.
그러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하늘을 봤다. 그날따라 달이 둥그렇게 떠있었다. 어이없었지만, 그 작은 게 위로가 됐다. 선선해진 공기를 맞으며 난 달을 한참 바라보았고, 집에 다시 걸아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있는, 달보다 더 작은 것들을 맞이했다.
마주치면 항상 웃으며 인사해주시는 미용실 사장님, 밤이면 돗자리를 깔고 나와 담소를 나누시는 앞집의 할머님들, 가게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떡볶이집 사장님, 날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길고양이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것들이 내게 위로가 됐다. 어쩌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건 큰 기회나 행운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