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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n 20. 2019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 천상의 피조물'에는 불교를 공부하다 열반에 든 로봇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로봇은 스스로 생각하고 불교 논리를 근반으로 철학적 고민을 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은 그 로봇을 인명스님이라 부르고 그는 승려들에게 설법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런 로봇을 두고 제조사는 '실패작'이라며 제거하려 한다. 제조사 회장은 총을 든 제거반을 데리고 로봇을 폐기처분하러 온다. 불교계는 그와 충돌하며 발포 작업을 저지한다. 결국 로봇은 스스로 시스템을 종료시키며 자살을 하고 스님들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며 절을 한다.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로봇은 깨달음은 본인의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한다. 누구나 깨달음은 있지만 다만 그걸 잊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듣고 생각했다. 난 무얼 두려워했고,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될까. 


난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게 가장 무서웠다. 수능이 끝나고 너무나 세상이 궁금해 지역 토론 모임에 무작정 참여했다. 인터넷 카페를 기반으로 구성됐던 그 커뮤니티에는 어른이 많았고 10대는 나 한 명뿐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참석했다는 누군가의 물음에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게 싫어서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많이 나누고 배우고 싶어서 참여했어요. 저는 진짜 흔한 어른이 되는 게 제일 무서워요."라고 답했다. 현장의 반응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여기 있는 저희가 그저 그런 흔한 어른이라 죄송해요."쯤의 반응이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당돌했다. 그렇게 난 20대가 됐고 그저 그런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먼저 친구들을 선택해야 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낼지, 어떤 감정을 나눌지 결정해야만 했다. 다음은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어떤 일을 할지, 무엇이 재밌는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난 모든 선택에 있어 두려움을 느꼈다. 친구를 선택할 땐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쟤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어떤 감정을 나누려 할 때, 내 감정이 평가절하 당하면 상처받을까, 내 감정이 저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했다. 진로를 선택할 땐 남들한테 무시당하진 않을지, 돈을 잘 벌 수 있을지, 가족에게 떳떳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사방이 두려움이었고 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기분이었다. 저 영화는 내게 한 가지 물음을 던져주는데 바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이다. 난 무얼 두려워했을까. 돈이 없는 미래?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안? 영화를 본 후에도 그에 대한 물음과 고민은 끝이 없었다.


백석의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는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화자는 귀신들을 두려워해 옴짝달싹 못한다. 여기를 가면 이 귀신이, 저기를 가면 저 귀신이 있다. 귀신의 종류는 다양하며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각각 있어 보인다. 결국 화자는 귀신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말한다. 화자는 왜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귀신을 두려워할까? 멀리서 바라본다면 진짜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잡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가져와 내 공포로 삼아 한참을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내겐 돈, 인정, 사람과 감정이 귀신이었다. 난 그 귀신들을 두려워했고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다. 언제쯤 그 두려움이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그만둘 수 있을까?


영화에서, 스님이 된 로봇을 검사하던 제조사 직원은 그를 믿지 않았다. 로봇은 그저 부품이고 수단인데,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스님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러다 무엇을 두려워하냐는 로봇스님의 말에 무언가를 느끼고, 끝까지 로봇을 변호한다. 그렇게 어이없게 로봇스님을 믿게 되고 로봇이 열반에 든 후에 로봇과 사람이 다를 게 뭔지, 인간의 마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어쩌면 그에게 귀신은 로봇이 사람을 전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겐 모두 그런 어이없음이 필요하다. 귀신이라는 어이없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화자를 보여주는 백석은 독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람들이 느끼는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 즉 각자의 귀신들을 어이없는 사건으로 해소하길 바라진 않았을까. 나도 그런 어이없음을 기다린다. 내 귀신들을 깨부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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