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련 Jun 20. 2019

원망을 허락하라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

우리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다면 어떤 느낌일까. 가장의 부재를 느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함부로 상상할 수 없겠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 A와 오랜만에 만났다. A는 16살 이후로 못 본 자신의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긴 그 아버지란 사람이 느꼈을 일체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미련하냐고 말했다. "왜긴, 그래도 나 낳아준 아빠잖아. 좋은 추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더 나이 들면 그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A는 술만 취하면 가족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자기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되뇌며 A는 원망할 권리를 주체적으로 포기했다. 맘 같아서는 냉수라도 A의 얼굴에 뿌러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동정 받아야 할 건 네 아버지가 아니라 너라고. 제발 맘껏 욕지거리라도 하거나 네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물건이라도 좀 부수라고. 어떻게든 원망하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A는 잔에 남은 술을 비우기만 할 뿐이었다.


왜일까. 난 임화가 밉다. 어린 여동생의 원망할 권리를 빼앗아버린 그가 밉다. 분명 그 사회 운동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의 평가와 별개로 그 운동은 역사적으로 유효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의미가 어쨌든, 적어도 화자의 오빠는 어린 두 동생을 차가운 시대에 외로이 남겨두었다. 어린 여동생은 그 의미를 이해조차 잘 하지 못하지만 왠지 오빠를 원망할 수 없어한다. 그저 '우리 오빠는 더 멋진 일을 한 거야' 정도로 생각한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적어도 오빠는 누이에게 정확한 의미를 설명했어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숱한 고민에 담배 연기만 방에 가득 채우면 안 됐다. 그의 담배연기와 함께 누이는 그를 원망할 권리를 잃어버렸다. 어린 두 동생을 두고 떠나버린 그를 원망해도 되는데.


물론 알고 있다. 짧은 시로 그 의미를 담아 내기 위해 너무 많은 걸 잘라내야 하고 난 아마 그 잘린 부분의 빈틈을 파고들어 이런 비판조의 글을 쓰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과 결을 달리해 말을 하고자 한다. 그에겐 사회를 바꿔야 하는 사명감 뿐 아니라 어린 두 동생을 챙겨야 하는 의무감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그 의무감을 던져두었고. 작가는 차가운 시대에 버려졌음에도 그 의무감을 져버린 그 오빠를 응원하는 화자를 내세운다. 그만큼 그 사회운동이 고결함을 말하려 했던 것이겠지. 좋은 장치고 좋은 작품이라 말하는 것에 이견은 없다. 다만, 못지않게 차가운 지금 시대에, 어린 두 아이를 두고 떠나는 어른을 용서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비록 문학 작품이라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해도, 난 다르게 그 의미를 표현한 작품을 읽겠다. 물론 예술의 표현은 제약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나, 그것이 어느 가치를 건드는 것이라면 재고하겠다.


난 오늘도 누이동생과 A가 슬프다. 누이동생을 만날 수는 없으니 A에게 연락해 또 한 잔을 해야겠다. 그리고 이 시를 보여줘야지. 야 임마. 누이동생이 참 너 같지 않니. 너처럼 참 미련하게 착해빠졌지 않니. 좀 원망해라. 속 시원히 원망해라 임마.

작가의 이전글 인간들이여,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