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련 Jun 20. 2019

아빠를 싫어하려다 실패했네

-      오장환 『성씨보』

아빠는 옛날 사람이다. 꽉 막혔고 올드하며 답답하다. 대화를 시작하면 5분도 안 돼서 난 아빠의 사고방식에 염증을 느끼고 적당히 둘러댄다. 대부분 ‘응. 알았어. 알아서 할게. 잘 하고 있어.’ 단지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정도의 말들로 대화를 끝낸다. 아빠는 내게 결혼해서 대를 이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고 막내지만 장남이니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느니 내가 딱 싫어하는 전형적인 어른의 모습이다. 생각뿐만이 아니다, 평소 생활은 또 어떻고. 매일 술을 진탕 마시고 엄마를 귀찮게 굴지를 않나 툭하면 신경질에!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몇 번이고 아빠와 같이 가부장처럼 늙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가족 아무도 모르게 난 아빠에게 내 마음의 문을 슬쩍 닫아놓았다. ‘앞에서만 적당히 받아주고 더 귀찮게 하면 가버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빠를 대했다

.

그날은 오랜만에 엄마와 아빠가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 집에서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옛날에 살던 허름한 집 얘기부터 아빠가 직접 지은 새집에 들어갔을 때에 관한 얘기, 이웃집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소음에서 음악으로 바뀌어가던 시간들까지 연도별 스토리를 한 명씩 꺼냈었다.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었는데. 그래서 난 요즘 작곡 공부하잖아.” 별 뜻 없이 내뱉은 내 말에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외삼촌 집 갔을 때, 거기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강산이 네가 피아노 뚱당뚱당 치던 거 기억 안 나?” 내 기억엔 전혀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자 대화는 자연스레 나의 어릴 적 모습으로 이어졌다. 엄마가 나가면 엄마 옷에 코를 박고 엄마 냄새를 맡아대던 모습, 비싼 고기는 안 먹고 라면만 먹어대던 모습, 아빠 뒤에 딱 붙어 아빠 등에 비비며 자던 모습.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아빠는 정말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잠에 들기 전에 남몰래 울컥했다. 미운 행동만 하던 꽉 막힌 옛날 사람인 우리 아빠는, 옛날부터 나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넌 어려서부터 이걸 참 좋아했어.” 난 내 눈에 아빠의 미운 모습을 담아냈는데 아빠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때부터 나의 모든 걸 당신 눈에 담아내고 계셨다. 


셋째 누나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빠와 백화점을 걸으며 팔짱을 꼈다. 내 팔을 아빠 허리에 감싸보기도 했다. 아빠는 아들도 돈 많이 벌어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으라고 했다. 대가 끊기지 않게. “아빠, 요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 볼멘 대답에 아빠는 여느 때처럼 낡은 소리를 했다. 나도 여느 때처럼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도 그날은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아빠와 깍지 끼고 손을 잡았다. 나도 아빠처럼 아빠를 기억하려고.


왤까, 성씨보를 읽으며 내내 아빠가 생각났다. 화자가 이유 모를 성씨를 지닌 것처럼 나도 아빠에게 성을 물려받아서일까? 관습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그의 모습이 나랑 너무 닮아서일까! 이 시를 읽으며 떠오른 내게 가장 가까운 구관습의 결정체인 아빠의 모습이 답답함보다 애틋함이 먼저 내 가슴을 치는 건 왜일까? 읽을수록 뭔가 기분이 묘해지는 시다. 나는 여전히 화자처럼 꾸준히 가치 없게 느껴지는 낡은 관습에 신경 쓰지 않고 살겠지? 하지만 내가 아빠에게 느끼는 부자간의 감정만큼은 아니더라고, 다시 생각해볼 만한 관습이라면 생각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아빠가 내게 보인 기억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것만큼 늦어버리고 싶지는 않기에!


작가의 이전글 원망을 허락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