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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n 20. 2019

소라껍질

이육사『노정기』

  얼마 전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친구가 내게 유년 시절이 어땠냐고 물었다.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괜히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고등학교 시절 일도 기억이 또렷하진 않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흐릿하기만 하다.


  그래도 확연히 기억나는 게 몇 가지 있긴 하다. 부모님이 싸울 때면 난 방에서 혼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거나 몰래 엉엉 울었다는 것 정도. 그래, 맞다. 엄마아빠는 자주 싸웠었다. 이제 와서야 누굴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엔 정말 힘들었던 거 같다. 열 살 즈음 아이에겐 힘들 법도 하다.


  내 방엔 소라껍질이 있었다. 소라껍질에 귀를 대면 바닷소리가 들린다기에 바다에서 주운 소라를 방에다 두고 틈만 나면 귀를 대보곤 했다. 그 바닷소리는 그날 내 기분 따라 변했다. 하루는 파도소리가, 하루는 갈매기 소리가, 하루는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친구에게 물음을 받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겨우 생각해낸 이 기억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날 내 꿈에도 나왔다. 난 나를 3인칭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어린 시절의 나는 주위의 어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른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정말 날카로웠다. 그 아이는 방으로 달려가 소라껍질을 귀에 대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저번처럼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라껍질을 타고 어른들의 고성이 들어오는 듯했다. 그렇게 꿈은 끝났다.


  소라껍질에 매달려온 거미로 자기를 설명한 이육사의 시를 읽으며 마침 그 일이 떠올랐다. 소라껍질이라는 것과 겹치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는 시를 쓸 때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렇게 비유했을까. 내게 소라껍질은 막막할 때마다 귀에 대보는, 현실의 소리에 도망쳐 바닷소리에 기대고 싶었던 것 그 정도였던 듯한데. 그에겐 금방이라도 부서질 거 같은 존재에 아슬아슬하게 기대온 존재였던 듯하다. 그의 소라껍질과 나의 소라껍질은 맥을 같이하는 부분도 있다.


  엄마랑 광주로 전학을 가면서 강진에 있는 방을 정리했고 그 소라껍질은 아마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꿈에서 깨고 나니 그 소라껍질이 그리웠고 그냥 꿈속에 그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꿈까지 꿀 정도로 내가 어렸을 때 불행했나 되짚어보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기억이 날 괴롭히지는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하다는 건 분명히 알았다. 그래도 그 소라껍질을 다시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난 그래도 꿋꿋이 앞으로 나갈 것이기에. 이육사도 이 시를 쓰고 나서 본인의 소라껍질을 버리고자 다짐했을까? 그의 인생에서 그 소라껍질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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