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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Nov 18. 2019

왜 나에겐 욕망만 주고 능력은 주지 않았나요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사람은 열등감을 이길 만큼 강해져야 한다.

"내 질투심에선 썩은 냄새가 나"

우연히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나온 대사를 보게 됐다. 그리고 한동안 질투심과 열등감에 눈멀어 나를 파괴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 시기는 여전히 내게 어려웠던 시기로 남아있다.

그렇기에 언제 가장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질투심을 느낄 때라고 답하겠다.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어떻게 하죠


난 항상 타인을 질투했다. 나보다 잘생긴 사람을,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나보다 인기가 많은 사람을, 나보다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미리 앞서있는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질투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질투하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착했고, 친절했다. 난 그들을 미워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 


그렇기에 괴로웠다. 난 왜 죄 없는 저 착한 사람들을 질투하지. 왜 질투라는 감정을 넘어 미워하고 싶어 하지?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난 그들보다 못생기고, 글을 못쓰고, 인기가 없고, 스펙이 딸리고, 능력이 없어서였다. 


하루는 같이 일하던 조직에서 나랑 동갑인 남자 동료가 있었다. 성별도 나이도 같은 그는 나를 열등감 덩어리로 만들 만큼 재주가 많았다. 나보다 똑똑했고, 영상적인 감이 있었고, 끈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글도 더 잘 썼다. 항상 그는 칭찬의 대상이었다. 그의 옆에서 난 진심으로 박수 쳐줄 수 없었다. 그게 멋있는 모습이란 걸 알지만, 난 그런 멋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는 칭찬받을 때면, 난 마치 버려진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초라했고, 비참했다. 겉으로는 나도 그를 칭찬하고 축하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난 엉엉 울고만 싶었다. 나의 질투심이 찌질해서. 그런데도 그가 너무 부러워서. 그를 미워하고 싶어서, 그를 따라잡고 싶어서. 그만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욕망뿐인 빈털터리


그 후로 난 나를 욕망 덩어리로 규정지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서 멋지게 성공하고픈 욕망 덩어리. 하지만 그 성공의 기준 따위도 정하지 못한 속이 텅 빈 그런 욕망 덩어리. 난 조금씩 나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고 죽고 싶어 졌다. 이런 얘기를 가까운 친구들에게 꺼내놓으면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했다. 


'넌 지금껏 해온 게 많잖아. 네 스펙이면 어디서도 안 꿀려. 힘내. 넌 아직 어려. 잘하고 있어 넌.'


너무나도 감사한 말들이지만 어쩐지 내겐 힘이 되지 않았다. 저런 존재들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자기혐오를 멈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난 그들을 또 질투했다.


'칫... 자기는 직장도 잘 다니면서. 자기는 차도 있으면서. 자기는 애인도 있으면서. 자기는 돈도 많으면서...'


그들의 속 사정 따윈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의 난 그저 탓할 상대, 나를 더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그 요소들에 나를 비교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난 그렇게 더 깊은 자기비하에 빠졌고 이는 곧 자기연민으로 바뀌어갔다.


동정받길 원하면서, 동정받으면 기분 나빠


정말 이상했다. 어느샌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다. 언제부턴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미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나의 상태를 가까운 친구들은 우려했다. '날 동정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면 금세 괜찮은 척을 했다. '이러다 괜찮아지겠지 뭐~' 이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다. 찌질해 보이기는 싫어서.


그러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도 그 저의를 의심했다. 


'나만큼 힘들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난 가시를 세웠고, 가끔은 그런 내 모습에 만족했다. 그런 내가 무슨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느꼈던 거 같다. 현실은 그저 찌질한 백수일뿐인데... 


내가 질투하는 사람들처럼 멋져지려면 능력이 필요한데, 그런 능력을 타고나지 않는 내가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대사가 한동안 날 괴롭혔다.


'왜 나에겐 욕망만 주고, 능력은 주지 않았나요.'


그래도 나는 지킬 게 있잖아


그러다 오랜만에 조카들을 만났다. 다섯 살, 세 살, 한 살배기인 조카들은 활발하고 명랑하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내게 안기고 내 등을 올라타면서 장난을 친다. 어느샌가 한 살배기 조카도 날 보면,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웃는다. 나의 모습이 익숙한 모양이다. 


아 그런데 난 정말 어이없게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질투심과 열등감에 똘똘 뭉친 이 찌질한 성인을, 이 아이들은 사랑해주고 있었다. 


가끔 조카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언어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사랑스럽다고. 그런데 이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의 삼촌이라는 나는, 너무 초라했다. 너무 부족하고 바보 같았다. 이렇게 머물러있으면, 저 소중한 존재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나의 조카들도 세상에 나올 것이고, 그 모진 바람에 흔들리고 쓰러질 것이다. 난 삼촌으로서 그들을 지지해야 하고 그들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약한 모습으로는 안 된다는 강한 전류가 날 뒤흔들었다. 


난 다음 날부터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딱히 무언가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나의 심리상태를 체크했고, 내가 오늘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질투심과 열등감이 몰려올 때면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조금 멀어져서 생각했다. 이걸 내가 계속 느끼는 것이 내게 이로운가. 답은 뻔했다. 쉽진 않았지만 난 계속 연습했다.


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이 정도 자기 관리는 필요한 거였다. 


그리고 언젠가 내 조카들이 나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난 너희를 보며 그걸 이겨냈다고. 


지킬 것이 있는 삶은 참 행운이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다.

하지만 난 여전히 지켜야 할 존재를 소중히 떠올린다. 


지켜야할 존재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겠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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