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소설

주위에 한 명씩 있는 쎈 누나 - 1편

내가 솔직해야만 했던 이유

by 류련

쌈닭. 치타. 쎈 누나. 암사자. 제시 언니. 경영학과 미친년.


내가 공대를 다닐 때부터 들어오던 별명이다. 졸업할 즈음에 유행했던 내 별명은 '제시 언니' 혹은 '쎈 누나'였던 거 같다. 내게 이런 변명을 붙인 이유는 사이다처럼 시원한 발언과 행동을 다 하고 살기 때문이란다.


사이다의 기준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학과 술자리에서 은근히 내 어깨를 만지며 3차는 자기 자취방으로 가자는 동기한테, 맥주에 사이다를 섞어서 면상에다 뿌린 적이 있었다. 또, 한국 여자들은 가슴이 b컵도 안 되는 년들 투성이라고 말하며 은근히 여학우들 가슴을 흘끗거리던 선배 새끼한테는ㅡ"한국 남자들 좆도 아폴로 크기 아닌가? 역시 불량식품이라 한입에 쪽 하고 빨아먹어도 존나게 배고프지."ㅡ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얼마 없던 여자 후배들 사이에서 제시 언니가 되었고, 남자 선배들 사이에서는 쌈닭 혹은 미친년 정도로 불렸던 거 같다.


하지만 난 꼭 받은 만큼 돌려주려고 아등바등 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강의 첫째 날에 다짜고짜 학생들에게 사는 곳과 부모의 직업을 캐묻던 교수놈한텐, ㅡ"중학생 때부터 고아였는데요."ㅡ라고 말하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뺨 칠 정도의 눈물 연기로 그의 무례함을 되돌려주기도 했으니까.


아, 난 그냥 솔직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만 인간답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길 가다가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한텐 내가 만만하냐고 되물었고, 남자 손님한테만 양을 더 많이 주는 냉면집 사장님한텐 내가 저 남자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먹을 수 있는데 왜 차별하냐고 따지기도 했다.


물론 위압적인 상황이거나 여자는 나 혼자고 남자들 뿐인 상황에서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회사 면접 때 내 출신 대학을 가지고 어쩐지 사진에서부터 공부를 못하게 생겼더라고 입을 놀려대는 면접관 앞에서 그랬다. 남초 회사에 입사한 후, 동남아 섹스 마사지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남자 팀원들과의 회식 때도 그랬다.


그럴 때면 난 친구들과 술을 왕창 마시며 쌍욕을 하고, 코인 노래방에서 소찬휘-김현정 메들리를 부른 후, 자취방 근처 화단에다 토를 했다. 그리고 아침에 변기에 앉아 내가 박혁거세를 낳는 건지, 술똥을 싸는 건지 모를 만큼의 배변을 하는 루틴을 돌아줘야 솔직하지 못했던 분노가 가셨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할수록 나는 루틴으로도 풀 수 없는 분노가 쌓여갔고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됐다.


난 (M자 탈모와 원형 탈모를 가리려고 이마에는 붙임머리를, 정수리에는 흑채를 뿌린 게 너무 티 나는) 정신과 남의사와의 상담치료를 통해 내가 왜 솔직하지 못하면 분노로 치환된 감정에 휩싸이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는 스무 살 적, 아빠에게 겁탈을 당해 강제로 임신을 했고 결혼을 해야만 했다. 엄마의 시어머니는 당신은 18살에 시집 가, 겨울에 찬 물에 빨래를 하고 시댁 식구의 삼시 세 끼를 차려야 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엄마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정도면 편하게 해주는 거라며, 이런 건 시집살이도 아니라고 항상 못 박았다. 그래도 엄마는 참았다. 시어미에게 대드는 건 효가 아니라는 엄마 아버지의 으름장 때문이었다. 또, 그런 친정에 이혼녀 딱지를 붙이고 돌아가 봤자 엄마가 살 수 있는 방안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선택한 방법은 존나게 버티는 거였고 엄마는 19년을 그렇게 버티며 살았다.


그런데 인생도 참 거지 같은 게, 19년을 버티다 아빠가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평소에 술 담배를 숨 쉬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남자였으니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게 말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발작을 일으키고 눈을 뒤집어 깐 채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아빠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심폐소생술 하는 방법을 몰랐다. 엄마가 아는 건 제사상 차리는 방법, 식구들 생일상에 올라가는 미역국 만들기, 주름 지지 않게 빨래를 돌리는 방법, 먼지가 의외로 잘 쌓이는 방구석 같은 것들 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119에 신고하는 법은 알았지만, 엄마의 핸드폰은 몇 달째 고장 난 상태였다. 남편에게 새 휴대폰을 사달라고 3개월이나 부탁했지만 엄마의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다. 집 안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편네가 무슨 새 휴대폰이냐는 구박만 먹었다. 결국 나에게 조 씨라는 성을 물려준 아빠라는 사람은, 내가 집에서 50미터 떨어진 철거 직전의 공중전화로 부른 119 앰뷸런스에 죽은 채로 실렸다.


엄마의 시어머니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의 엄마를 괴롭혔다. 남편을 잡아먹은 계집이라고. 아들도 못 낳은 집구석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고 끊임없는 당신의 솔직함을 털어놨다. 난 그럴 때마다 엄마의 시어머니(흔히들 친할머니라 부르는)에게 분노를 축적해갔다. 자신의 아들이 룸살롱에서 수백만 원어치 술을 마시고 와도 다음 날 해장국을 끓여다 먹여주는 그녀의 모순적인 넉넉함에, 그런 아들의 사망보험금을 미리 전부 다 자기 앞으로 해놓은 치밀함에 미치도록 분노했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그녀의 명의로 되어있는 집에서 어떻게든 지내야 했기에 그 분노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며 사는 그녀의 삶이 인간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인간다운 삶이 드라마에 나오는 행복한 대가족이나 넓은 집이어야만 하는 건 아녔지만, 그래도 엄마같이 혼자 남겨지는 삶은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분노는 인간답게 살지 못한 나의 엄마에게도 이어졌다. 엄마는 아빠의 장례식 때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그렇게 갖은 억압을 당하면서도 아빠에게 의존했다. 아빠 덕분에 먹고 사는 거라며 내게 말했었다. 남편을 잃은 채 이제 나에게 의존하는 엄마에게 난 결이 다른 분노를 느꼈었다. 하지만, 난 엄마가 불쌍하면서 한심했고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엄마를 사랑했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과 내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상이 내겐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갈수록 흑채로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정수리가 투명해져 가는) 나의 정신과 주치의였고 나머지 한 명은, 학과의 모두가 나를 쎈 누나(혹은 제시 언니)라고 부를 때 유일하게 나의 이름인 수영이 누나라고 불러준 남자친구 준수였다.


그리고 난 지금 준수의 장례를 전부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준수는 왜 자살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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