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난 가족의 힘을 믿는다
엄마가 보이스피싱으로 700만 원을 털렸다.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의 안정감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자책하지 않도록, 엄마는 잘못이 없다는 걸 알리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가해자들의 보이스피싱 방법은 아주 교묘했다. 셋째 누나의 포털 사이트 주소록을 해킹해 엄마에게 메신저로 접근했고, 누나인 척 채팅 하면서 카드정보를 알아낸 것이다. 그들은 엄마에게 어플을 설치하게 했고, 엄마의 스마트폰을 복사해 원격으로 조종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출까지 받아 해외로 송금을 하고 잠적했다. 엄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700만 원을 털렸다는 사실보다, 딸이 잠깐 결제할 게 있다는 도움 요청에 허겁지겁 카드 정보를 알려준 당신의 행동에 자괴감을 느꼈다. 한 번 더 전화해서 확인해볼 것을- 의심해보고 알아볼 것을- 하며 철저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당신의 행동에 후회하고 본인 탓을 했다.
엄마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서울에서 지내는 네 명의 자식들은 당장 부모님이 지내는 전라도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매형들은 다음 날 출근이었지만 전부 연차를 냈다. 그 저녁에 자식들은 차를 타고 내려가 새벽에 본가에 도착했다. 잠을 잔 후 다음 날부터 바삐 움직였다. 모두가 각자 역할을 나눴다. 큰 매형은 통신사에, 누나들은 경찰서에, 작은 매형은 금감원에, 나는 기타 카드사와 결제대행사에 연락을 했다. 우린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황을 수집해 서로 공유했다. 주말이 끼는 바람에 수사기관 측에서는 사건 담당자가 배정되지 못했다. 나는 진술서 초안을 작성해 지금껏 수집한 정황과 팩트에 기반해 추측 가능한 사항들을 정리했다.
이렇게 각자 맡은 일들을 하다 보니 저녁이 금방 왔다. 엄마와 아빠, 누나들과 매형, 나까지 모든 가족들이 모여 술 한잔을 했다. 앞으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누가 담당해서 처리를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도 중요했지만,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엄마가 자책감에 아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나들도 생각이 비슷했다. 우린 실없는 농담을 엄마에게 하며 엄마가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엄마, 동네에서 가장 촉새인 이모가 알아버렸으니까, 엄마 사기당한 거 이제 동네 이모들 다 알고 있겠네?"
"응 그렇겠지 뭐."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엄마, 이제 엄마한테 보험 들라고 부탁했던 동네 이모들한테 먼저 말해버려. '소식 들었지~? 나 이번에 개털 돼버렸어. 어휴~' 이렇게 하면 이제 다른 이모들도 엄마한테 뭐 사달라고 못하지 않을까?ㅎㅎ"
내내 울상이던 엄마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도 너희들이 내려와서 일처리를 다해주니 든든하고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일이 터지자마자 팔 걷어붙이고 똘똘 뭉친 형제들의 모습에 아빠는 감동받은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둑맞아버린 700만 원이야 이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700만 원을 내고 더 끈끈히 뭉치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은 피싱으로 사기를 친 그들이다. 어느 누구 하나 누군가의 부주의라며 탓하지 않았다. 우린 그저 가만히 뭉쳤다.
살다 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생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위기가 찾아온다. 각오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어려운 일들이 몰아닥친다. 그럴 때마다 우린 뭉쳐야 한다. 연대해야 한다. 서로를 탓해서는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믿는다. 앞으로도 더한 기상천외한 미친 일들이 많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중요한 건 믿음이다. 결코 나의 가족들에게 난 절대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내가 나로서 소중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안정감. 이런 믿음을 갖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이기에 굳게 지켜나가야 할 믿음이다. 어떤 일이 있든 어떤 환경에서든 가족끼리는 서로가 절대로 버려지지 않고 혼자 남겨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거칠고 외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쩌면 앞으로 가족과 부딪히고 싸우는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족이지만 남이고 각자가 너무 다르니까. 하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 서로는 서로의 편이라는 사실을 앞으로도 난 믿을 것이며, 믿음의 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것이다. 이 거칠고 외로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내가 기대고 싶은, 내가 기둥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