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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n 23. 2020

부모도 자식에게 사과할 줄 알아야 한다

가족은 그래야만 하고, 평생 가져가야 하니까.

아빠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해야 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걸 싫어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더 강하고 위압적인 태도 대했다. 엄마를 포함한 우리의 가족은 전부 아빠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했다. 아빠는 최고의 권력자였고, 난 27년 만에 처음으로 반역을 일으킨 아들이었다.




아빠는 술을 자주 마셨다. 술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본인이 술을 마실 땐 항상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처음엔 나도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는 했다. 귀찮았지만 아빠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알고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짐과 고민을 지고 있을 거라고. 내가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격감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대학생 떈 아빠는 나의 진로에 대해 말을 했다. 직장을 잡자 나의 돈벌이에 대해, 대기업을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난 그것들이 괴로웠다. 내가 말주변이 없는 것이 지 모르겠지만, 도통 아빠와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한 나의 결정을 아빠는 수많은 세속적인 이유들로 까내렸다. 난 아빠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새로운 지론과 생각을 말했다. 아빠는 너무 고리타분했고, 난 지나치게 허공에 떠있었다. 61년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란 아빠와, 94년에 태어나 서울에서 젊은 날을 보내는 나는 도저히 통하는 구석이 없었다.


세속적인 논리에 내 삶을 맞춰가라는 소리는 사회에서도 수도 없이 듣는 것이었다. 가정은 나에게 가정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빠의 그런 소리는 나의 편안과 안정을 깨는 것이었고 나는 그런 상황을 감내하는 게 힘들었다. 아빠와 그런 대화를 하게 될 때면 그냥 다른 생각을 하거나 아예 흘려버렸다. 아빠도 나의 이런 태도에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난 그렇게 조금씩 아빠와의 술자리를 피했고, 아빠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아빠는 혼자 술을 마시기 싫어했고, 술에 취하면 언성을 높여 자신의 삶에 대한 비탄을 쏟아내고 가족을 탓했다. '아무리 키워봤자 같이 술 마셔주는 사람 하나 없다'와 같은 말이 주를 이루었다. 나나 가족들이 왜 본인과의 술자리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난 아빠가 언성을 높여 말을 쏟아내는 게 싫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난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로 내 귀를 막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까 무서워서 이불속에서 벌벌 떨던 아이. 난 아빠의 높은 언성을 들으면 그때가 생각나 좌절감을 느낀다. 나의 이런 트라우마를 아빠는 모를 테지만, 이걸 설명하기도 지치기에 난 그저 외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해 설날은 예년보다 고향에 일찍 내려갔다. 목요일에 오후 반차를 쓰고 퇴근해 터미널로 가 6시간이 넘게 버스를 탔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내려가면 엄마와 아빠와 술도 마시며 애교 좀 떨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다. 명절에 들뜬 마음에 먼 거리의 이동에도 크게 피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 아빠와의 술자리에서 또 싸움이 났다. 엄마와 아빠는 어떤 이유로 다퉜고, 나는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난 늘 그랬듯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빠가 이미 술에 취한 후라는 거였다. 아빠는 자꾸 방에 들어간 나를 높은 언성으로 앉으라고 불러냈다. 싫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앉아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우겼다. 내가 아빠의 말을 끊고 마찬가지로 높은 언성으로 대하니 아빠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술상을 주먹으로 때려 부숴버렸다. 난 피가 나는 아빠의 손을 잡으며 다치지 않았냐며 보자고 했지만, 아빠는 필요 없다며 손을 뿌리쳤다. 


그제야 난 계속 참아오던, 눈 끝에 계속 걸려 있던 눈물방울을 터뜨렸다. 난 어려서부터 아빠의 이런 모습 때문에 무섭고 힘들었다고 소리쳤다. 나는 다시 나를 다시 찾지 말라는, 청소년 성장드라마 같은 말을 하고서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이미 자정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휴대폰은 비행기 모드로 해놓고 터미널 근처 모텔에서 방을 잡았다. 다음 날의 첫차를 알아보기 위해 잠깐 켠 폰에는 엄마와 아빠, 누나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끄고 엉엉 울었다. 안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나를 위해 운 것은 처음이었다. 난 항상 다른 이들과 나를 비교하며 살았다. 그래도 난 대학까지 갈 수 있을 정도의 가정에서 태어난 건 행운이라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자란 건 행운이라고 나를 다그쳤다. 괜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며 잘 살아내라고 나를 달래 왔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나를 위해 울었다. 기분 좋게 내려가도, 가부장적인 한 사람에 의해 평온함이 깨지는 가족을 가진 나를 마음껏 불쌍해했다. 


다음 날 첫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갔고 가족에게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아빠의 이런 행동이 참을 수 없이 상처가 됐지만, 마음 잘 추스를 테니 그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난 늘 그랬듯 나와 가족을 이해하려 했고 나 자신을 달랬다.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것 즈음 잘 알고 있었으니 긴 호흡으로 두고 생각하자고.




엄마는 3일 후에 전화가 와서 사과했다. 그러다 몇 주 후에 가족을 만났고 아빠는 내게 사과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아빠의 사과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사과를 받아 기쁘다가도, 연락을 모두 끊고 나서야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아빠에게 더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을 아빠가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난 용서했다. 어쩔 수 없다. 난 이 가족과 살아야 한다. 난 나의 방식대로 잘 다스리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들이 나이가 들수록 존재감에 대한 공허를 느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옛날엔 본인의 뜻대로 전부 움직였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는 가정과 사회에 대한 쓸쓸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그건 아버지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그것이 가부장적으로 살아온 본인에 대한 마땅한 징벌이든, 외로움의 가속화든. 다만, 우린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도울 수 있다. 상처를 줬다면 사과해야 하고, 내 가족의 마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돈을 번다는 이유로, 아빠라는 이유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따르던 때는 더 이상 없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린 가족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서로 배려하며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우린 가족이기 때문에 존중하며 서로를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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