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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l 23. 2020

무조건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

위급상황 시, 유아보다 성인이 먼저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 하는 이유

"산소마스크는 보호자가 먼저 착용한 후에, 유아의 착용을 도와주세요."


무작정 결정한 제주도 행 비행기가 출발했고, 승무원들은 안전 수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기내에 산소 공급이 필요할 때 내려온다는 산소마스크. 승무원들은 보호자가 먼저 착용한 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착용들 도와달라고 말했다. 내가 안전한 상태에서, 내가 먼저 살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난 나이스 가이 콤플렉스가 있었다. 동시에 완벽주의자인 성향도 있었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내 능력치 이상의 것들을 해내려고 했다. 후배들에게는 좋은 선배가, 동기들에게는 능력 있는 친구가, 선배나 상사들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고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난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굉장히 힘든 상태라고 생각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잡아주는 손이 얼마큼의 구원인지 잘 알았기에, 내가 그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내가 그들의 도움 요청을 잘 받아주어야 나도 나중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따위는 없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잘 보이고 싶었던 거다. 그냥 언제든 도움을 잘 주는 그런 멋지고 착한, '나이스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난 어디에서나 인간적으로도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후배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며 그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단번에 내려주는 솔로몬이고 싶었다. 프로젝트를 할 때면 추진력 있게 그들을 리드해서 후배들의 잠재력을 뽑아내고 프로젝트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내는 척척박사이고 싶었다. 동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적으로 유대감을 깊게 느낄 수 있고 언제든 부르면 나와서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고 싶었다. 그래서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나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졌고 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하고자 하는 동기들과 함께 일했다. 그 어떤 것도 놓칠 수 없었으니까. 그러면 내가 설정해놓은 이상향에 부합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내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은 한계가 있었고, 잘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수학보다 국어를 잘하는 학생이 있는 것처럼, A를 잘하는 대신에 B를 조금 못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다 잘하고 싶어 했다.  'A는 잘했는데, B는 좀 아쉽네.'라는 소리를 들을 때면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떻게든 B를 더 잘해서 '세상에! 어떻게 B조차도 잘할 수가 있어?'라는 평가를 받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난 알파고도 해내지 못할 만한 이상향의 모습을 나 자신이 갖추길 바랐다. 혹여나 내가 설정해놓은 이상향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못하면 나를 강하게 채찍질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내가 만족할 만한 평가를 받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으로 평가당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서커스단의 곡예사들은 춤추는 코끼리에게 당근을 주지 않는다. 그들을 춤추게 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오직 채찍만이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날 보며, 그들은 조금 더 박하게 평가하면 더 분발해서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전개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알파고가 되지 못하는 부족한 나를 자책했고, 나 자신을 한심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채찍질하면서 끊임없는 나락으로 추방시켰다.


그러자 정말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나의 사람들에게 나를 나눠줄 수 없게 됐다. 나를 나락으로 추방시키며 자책할 때, 그만하라면서 나를 온 맘으로 지지해주던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내가 알파고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무얼 해도 날 칭찬하고 응원했으니까. 그 소중함을 모른 채 나는  알파고가 되겠다면서 서커스단의 코끼리 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오랫동안 연락이 잘 닿지 않아 걱정했다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걱정되는데, 물어보면 더 부담이 될 거 같아 묻기 망설였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저하며 물을 사이가 아닌데.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나를 주저할 만큼 그들과 사이가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나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구나. 알파고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고 나는 단지 서커스단의 코끼리였구나!


그 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전부 멈췄다. 내 몫을 처리한 후 퇴사를 했다. 제주도 행 비행기를 예매하고 무작정 숙소를 예약했다.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비행기를 탔다. 출발 전 휴대폰을 끄기 위해 알람을 꺼뒀던 카카오톡을 켰다. 날 찾는 연락과 메시지들이 많이 쌓였다. 그 메시지들을 미리보기로 읽으며 마음이 불안했다. 아, 당장 내가 연락을 해줘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내가 다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줘야 하는데. 이거 어쩌지. 나 정말 이대로 멈춰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내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이 생각했다. 내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그들은 잘 해낼 것이다. 그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나의 도움이 없어도 그들의 삶에 큰 흠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비행기는 출발했고, 승무원들은 안전 수칙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산소호흡기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산소마스크는 보호자가 먼저 착용한 후에, 유아의 착용을 도와주세요."


내가 먼저 살아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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