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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l 24. 2020

그래도 꾸준히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글쓰기란 무엇일까. 글을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많아진 시대에, 전보다 더 다양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나보다도 어린 작가를 만나 그의 책을 읽게 됐다. 나의 또래가 책을 냈다는 게 처음엔 신기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뭔가 대단해 보였고 작가의 머리엔 나 따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한 생각과 지식으로 가득 찼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들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나의 글쓰기 능력에 끊임없이 회의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이 가진 능력을 소진한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한단다. 날고 긴다는 기성 작가들도 이런데, 신인이거나 나이나 경력이 많지 않은 작가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더욱 평가절하 당하기 쉽다. 기성 작가들의 연륜과 테크니컬 한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이 노련함이 부족한 젊은 작가의 책에 만족하기가 힘들 수 있다. 그 어린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어떤 부분은 과하게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으며, 어떤 부분은 너무 단순해서 납작했다. 하지만 젊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젊은 작가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의 그 어떤 글도 모두에게 울림을 줄 수는 없다. 모든 글이 꼭 답을 줘야 하는 건 아니다. 오롯이 그 나이 때 느끼는 감정과 이야기들은, 그 나이대의 작가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읽히는 그런 글들이 더 반가울 때가 있다. 글이란 게 이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것이라면, 그 글을 만들어내는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나는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의 솔직한 마음과 감정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얼마큼 솔직하게 써야 할지, 어떤 감정을 골라서 어떤 면을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은 고통이다. 하지만 그래서 후련하기도 하다. 표현하지 못하고 감내하기만 했던 감정을 글로 표현해내고 나면 어떠한 해소감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글쓰기라는 것은 양가적인 마음이 복합적으로 몰아닥치게 하는 행위이다. 가끔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들 때는 글조차도 의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거 써봤자 뭐하나-라는 생각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다가도 좋은 글을 보면, 나도 꼭 저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무력한 마음 저편에 피어나고는 한다.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오롯이 나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시작할 수 있고 스스로 계획을 짜야하고 나 혼자 실행해서 나 혼자 끝내야만 한다. 끝내는 게 다가 아니다. 너무 좋은 글을 써냈다고 만족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어쩌면 그 글은 내가 저번에 읽어서 나의 기억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좋은 글일지도 모른다. 마치 나의 머릿속에서 제일 처음 창조해낸 것 마냥 오해하기 쉽다. 글쓰기는 그렇게 치열한 나 자신과의 전쟁과 다름이 없다. 



  삶이랑 치열한 육박전을 벌일 때면, 우린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양 극단의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기대고 싶다가도, 그에게 피해를 주는 하찮은 사람이 될까 싶어 나를 다그치게 된다. 나의 외로움과 나약함을 들킬까 봐 경계하면서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붙잡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다. 너무 좋아하는 존재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미워지는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나도 싫은 그런 것이다. 이렇게 모순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가장 많이 묻어 나오기 마련이다. 어떤 외로움은, 들키고 싶어 하지 않지만 조금씩 들키는 방식으로 그 외로움을 이겨내기도 한다. 이렇게 본인의 마음을 부단히도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치게 해주는 글쓰기는, 어떤 글도 쓰지 않았던 어제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세상에 선한 것이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더 이상 개선될 여지가 없으며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나타난 선함에 충격받고 슬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곧 큰 위로가 되었다. 세상을 전부 등지고 나 홀로 지내겠다는 마음을 어떠한 선한 것이 나에게 손을 뻗어주는 때가 있는 거다. 선함 따위 없는 세상을 탓하며 썼던 글들은 너무 어두워서 다시 쳐다보기 힘든 것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땐 몰랐었다. 고통 때문에 얼떨결에 놓아버린 정신의 파편이,
내 사람에게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나의 감정 해소를 위해 글쓰기를 이용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한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신념이나 가치관, 사상이나 사람 같은 것들. 지금껏 내게 글쓰기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내가 지키고 싶은 존재들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한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소중한 것이 내게 다가왔을 때 그 감사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지금보다 더 어렸다면 그 값짐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중한 것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사랑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직업의 모습으로, 돈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분명한 건, 소중한 것은 가장 큰 파괴와 함께 온다는 거다. 내게 준 행복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상처를 내게 안겨준다. 괴롭고 많이 힘들고 눈물을 많이 흘리지만, 나의 상처로 나의 사람들을 또 상처 입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때만큼은 행복했기에 등가교환을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뿐이 없다.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나에게 행운과 행복을 안겨다 주는 소중한 것이지만 결국 그만큼 파괴를 안겨주는 것이다. 난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렇기에 꾸준히 쓰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 나를 위해서든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것 위해서든 나는 써야만 한다. 주위의 평가는 참고하되 그것이 나를 전복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괴로움과 외로움, 나를 위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 계속 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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