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는 마케팅팀 소속이었다. 당시 팀장은 굉장히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대표에게 자주 불려가 오랜 시간 성과 관련 미팅을 했고, 성과가 좋지 못할 때는 크게 혼나고는 했다. 그가 크게 혼나는 날에는 팀원들인 우리에게 더 신경질적이었다. 대표와의 면담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가 복용하는 약의 수는 증가했다. 그는 스트레스로 탈모를 앓았고 피부에도 트러블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팀장이 싫었다. 동료들과 그의 뒷담화도 자주 했다. 감정 통제도 하지 못한 채 부하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느꼈으니까. 그가 신경질 적이고 예민할 땐 나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더 까칠하게 행동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동료들도 같은 이유로 그를 싫어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 팀장을 향해 화살을 조준한 나의 행동이 정당했을까? 해당 회사를 나오고 나서, 나는 가끔 그를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은 학생들에게 체벌이 금지되지만 내가 학생일 땐, 매를 이용한 체벌은 물론이고 엎드려뻗쳐와 같은 얼차려도 흔했으며, 손찌검도 종종 일어났다. 나도 정말 많은 체벌을 받아봤다. 점심을 빨리 먹으려고 수업 끝나기 5분 전에 몰래 나와서 급식실로 가다가 걸려서, 두발 단속에 걸렸는데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버티다가, 숙제를 안 해서,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아서 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체벌보다 더하고 깊은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신경질 적이었던 과거의 팀장도 체벌보다 더한 흉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했던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사람은 학생들을 정말 잘 때렸다. 툭하면 학생들을 때리는 성격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겁에 질려 있었고, 무슨 행동을 하든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학생이 왜 선생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땐 그에게 맞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었다. 특히나 그 담임 선생님은 본인의 기분에 따라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극과 극을 달렸다. 본인이 기분이 좋을 땐 장난을 치다가도, 좋지 않을 땐 개인의 작은 꼬투리를 잡아서 반 학생 전체에게 벌을 주었다.
어떤 날은 그가 교실의 창틀이 청소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걸 발견하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그의 상처 내기는, 창틀 청소를 담당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매로 발을 때리며 무안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창틀이 지저분한데도 담당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먼저 솔선수범 하여 창틀을 청소한 사람이 없다면서 반 학생 전체를 탓했다. 개인의 잘못이 집단의 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그 선생님에게 담당 청소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학생을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하도록 교육할 수 있는지에 관한 교육적인 고민은 없었다. 그에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책략은 반 학생들 전체를 책상 위에 무를 꿇게 하고 손을 들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1교시부터 점심시간까지 벌을 섰고, 점심을 먹은 후에 우리는 또 벌을 섰다는 거다. 담임은 반장 한 명을 열외 시켜 그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반장 임의대로 벌서는 자세가 가장 좋은 친구를 20분에 한 명씩 선정해 앉히는 거였다. 40명이 넘는 학생들은 반장의 선택을 기다리며 두 팔꿈치를 귀에 붙인 채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본인도 아이들의 눈을 보는 게 신경 쓰였는지,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우리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이름이 불려지기만을 바랐다.
결과는 뻔했다. 반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아이가 일등으로 내려왔다. 다음은 부반장 같은 학급 임원들이었다. 그다음은 간식을 자주 대는 아이였다. 말 수가 많이 없거나 반장과 친하지 않은 아이들은 뒷 순서로 밀렸다. 담임은 반장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반장에게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어떤 친구에게 면별부를 부여해야 할지, 본인이 한 선택의 결과와 다른 친구들의 시선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그의 마음도 지옥이었을 것이다. 담임은 우리가 벌서는 동안 키보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반장이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앉힐 때면 키보드 소리를 멈췄다. 누가 내려오는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인이 특히나 더 좋아하지 않는 학생일 경우, 벌서는 자세가 좋지 않았다며 다시 책상 위로 올라가 벌을 서라고 했다. 그리고는 반장에게 엄포를 놓았다.
“똑바로 안 봐? 쟤가 벌서는 자세가 좋았다고? 제대로 안 고르면 네가 벌서는 수가 있다.”
선생은 그렇게 학생을 협박했다. 담임은 내려가는 순서를 보며 학내의 서열관계를 확인했을 것이다. 나는 점심시간 직전에 반장에게 선택받아 책상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반장을 원망하다가도,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정말 감사했다. 불합리한 현상에 순응해 권력자에게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매우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점심을 먹기 위해 다들 내려올 수 있었다. 1시간 동안의 자유였다. 많은 아이들이 팔이 너무 아파서 울었다. 팔의 통증 때문에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팔보다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편하게 앉아 있지만, 다른 친구들은 책상 위에서 무릎 꿇은 채 손을 들고 서있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몇은 오전처럼 팔이 아파서 울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권력자에게 선택받았다는 이유로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 선택받은 이유는 내가 그와 친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수 시간 동안 벌을 받는 이유는 그저 ‘창틀이 지저분해서’이다. 몇몇은 반장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반장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식판에 담긴 밥을 먹었다. 몇몇은 반장에게 다가가 떡볶이를 사줄 테니 다음은 자신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경제적인 프로핏을 제안하는 광경을 난 보았다. 그러자 반장은 자신은 정직하게 그저 벌서는 자세가 좋은 사람부터 내려주는 거라고 화를 냈다. 무턱대고 화를 내는 그의 감정이 무엇인지, 그때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났고 오후 수업 시간이 되자 선택받지 못한 친구들은 다시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벌을 받았다. 나는 순간 토악질이 나왔다. 있는 힘을 다해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담임 앞으로 걸어갔다. 겨우 나오는 토를 한번 삼켰다. 그리고 담임에게 토 할 거 같아서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그가 허락하자마자 난 화장실로 뛰어갔다. 난 화장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토를 복도에 쏟아버렸다. 화장실에 가서도 토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 먹은 아침식사는 물론, 아까 먹은 점심까지 그대로 내뱉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돼 쏟아졌다. 무언가 서러워서 계속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하지만 내 울음소리가 반에 들릴까 봐, 손으로 입을 또 막았다. 대걸레를 꺼내 복도에 흘린 토를 치웠다. 교실에 들어가니 여전히 학생들은 벌을 서고 있었고 담임은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오후 4시 즈음 담임은 모든 학생들을 자리에 앉혔다. 마지막까지 내려오지 못한 학생들은 친구가 적거나 은근하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끝까지 선택받지 못했다. 권력자와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은 가장 오랜 시간 고통받아야 했다. 창틀이 지저분한 것과 그 어떤 관련도 없는 친구들이었다. 창틀이 지저분한 이유와 죄 따위 그들에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마지막까지 고통받아야만 했다.
하교하고 집에 가서도 팔이 저렸다. 다음 날엔 마지막까지 벌 서던 친구들 중 몇몇이 병원을 다녀오느라 늦게 등교했다. 아마 그들은 팔보다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남았을 것이다. 반장도 그다음부터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는 자신이 빠르게 면벌부를 준 친구들과만 다니게 됐다. 나도 그를 미워했다. 자기는 벌도 서지 않았으면서, 자기 기준으로만 면벌부를 주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고통을 준 그가 미워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벌을 세운 건 반장이 아니었고, 그는 그저 담임의 명령으로 면별부를 주는 순서를 정하게 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어쩌면 무릎 꿇고 손을 드는 것보다 그에게는 면별부를 주는 것이 더한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장은 가해자가 아니었다.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저 권력을 쥐어 준 존재에게 희생당한 또 하나의 피해자였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처럼 그때의 일이 마음의 흉터로 자리 잡았을까? 그 반장은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담임은 지금도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지금도 학생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게끔, 눈치 보게끔 만들까? 지금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까? 지금도 반장에게 권력을 주고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 자신은 아닌 척 뒤에서 자신의 업무만 처리하고 있을까? 그는 아직도 굴욕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아이들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을까?
어른이 된 후에도 나는, 반장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미워했을지 모른다. 대표에게 혼나고 더 신경질 적이었던 과거의 팀장은 과거의 반장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나는 반장의 모습과 팀장의 모습을 겹쳐본다. 나는 지금도 벌을 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팀장을 원망하고 뒷담화 했던 행동은 정당방위일까. 그에게 화살을 맞추기 위해 겨냥했던 나의 눈빛은 정말로 정당한 걸까. 아니, 사실은 그런 권력관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그 사람을 탓해야 하는 건데. 난 혹시 지금도 권력자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미워하는 건 아닐까. 그에게 그 권력을 쥐어 주고, 권력을 휘두르게 만든 존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벌을 서고 있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