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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누리 Oct 20. 2022

#7 우울의 기록(1) 찌꺼기와 구더기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생각, 쓸데있는 생각을 하며 밀려오는 업무를 그저 쳐내다보면 구수해보이는 주황빛 노을이 집안으로 쏟아진다. 바람이 시리고 공기가 차갑지만 그 따뜻한 색에 현혹되어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기꺼이 찬기를 맞는다.


내 삶은 항상 그렇다.

알고 있지만 어느 하나에 취해 아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며 결국엔 내 마음과 곁을 모두 내어주고야 만다. 비록 겨울을 목전에 둔 가을의 찬 바람일지라도 선택하는 그 순간만큼은 후회없이 활짝 열었으리라. 지금까지의 내 모든 선택들이 그랬으리라.


그 찰나가 지나고 나면 나는 그 때의 나를 원망하기도, 사랑하기도, 다독이기도, 위로하기도 한다. 자책의 칼날이 나를 수 차례 베어도 아무는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그저 다가오는 날들을 견뎌냈다. 상처가 깊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도 있지만 결국엔 약간의 흉만 남긴 채 스르르 아물어갔다. 수십년을 그리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있다.

한 차례 나를 향해 감정을 쏟고 나면 대부분의 것들은 삭아 없어지지만 플라스틱이나 비닐봉지처럼 썩지 않고 남아 악취를 풍기는 것들이 있다. 나는 이 찌꺼기들을 청소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방청소, 주방청소, 욕실청소 모두 스스로 알고 곧잘 해낼 수 있었지만 마음 청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찌꺼기들은 지독한 냄새를 풍길뿐만 아니라 미움과 외로움, 분노와 절망이라는 구더기를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톱니같은 이빨을 가진 그것들은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주며, 눈과 사랑, 생각과 기억, 추억을 갉아먹는다. 간혹 채 아물지 못한 상처의 중심부로 파고들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줄 때가 있는데 나는 아직 그 고통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그저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상처의 피를 맛본 구더기가 배를 불려 빠져나올 때면 나도 일어나야만 한다.

같은 고통이 반복되고 내가 어찌 될지 알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야만 한다.

삶엔 일시정지가 없으므로, 그리 해야만 한다.

재생 또는 정지 뿐인 삶이 때론 잔혹하고 버겁지만 아직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진 않기에 노이즈 섞인 삶의 테이프를 계속해서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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