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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누리 Nov 10. 2022

#8 우울의 기록(2) ※주의※기대'하'지 마시오

문득 '※주의※기대지마시오'는 단연 신체의 안전만을 위한 경고문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나 산 등성이 난간, 절벽 추락 방지 구조물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 경고문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안전을 지키고자 장치를 만들었으나 필요 이상의 하중이 실리거나 만약의 오류로 인해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마음도 그렇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댈 품을 열었다고 해서 마음껏 기대서는 안된다. 강인한 마음, 햇살같은 온정, 하늘보다 너른 이해심으로 나를 품는다해도 필요 이상의 부담이 실리거나 만약의 실수로 인해 언제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서있기 위해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운동 후 통증을 겪은 뒤여야 근육이 성장하듯, 마음의 근육도 시련을 겪고 아픔을 느낀 후여야 성장한다. 고통을 겪는다, 라는 불변의 공식은 다루지 못할지라도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는 방법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기대하지 않는 것. 기대는 것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마음이다. '기대'라는 것은 단순해보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선물이나 칭찬처럼 대단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우린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만나는 모든 이들, 또는 마주하는 모든 상황에서 기대의 마음을 품는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는 A와 B가 있을 때 A가 B를 반드시 나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한다. 내가 이 둘을 사랑하는 만큼 이 둘도 서로를 아끼고 좋아했으면 하고 말이다. 하지만 A와 B, 그리고 나는 각기 서로 다른 독립체이며 각자의 사고와 신념, 생활양식, 취향 등을 가지고 있다. A와 B가 서로를 나만큼 좋아하고 나만큼 이해하려면 내가 그들을 겪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억겁의 시간을 들인다 해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와의 여행 중 벚꽃나무 아래 너무나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기회가 생겼다. 내 앞사람이 사진을 찍을 땐 살랑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그림처럼 날려 영화 포스터 부럽지 않은 인생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나도 그 타이밍을 노리고 싶어 곧장 나무 아래로 뛰어들었으나 거짓말처럼 바람이 멈춰 앞사람만큼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순 없었다. 만약 내가 앞사람과 같은 사진을 기대했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왜 하필 내 순서에 바람이 멈춰서', '재수도 없다' 같은 부정적인 말들로 내 기분을 끌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저 맑은 하늘, 핑크빛 벚꽃나무 아래 선 나의 청춘에 집중할 수 있다. 충분히 예쁘고 의미있는 그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남겨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이성보단 감정이 앞서 여전히 힘든 시간을 겪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실망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좌절을 느낄 때 주문처럼 되새긴다. '기대하지 말자'. 속으로 열댓번 읊고 나면 거짓말처럼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는다. 오늘도 난 크고 작은 실망과 미련, 자책을 겪어내며 주문을 외웠다.


'기대하지 말자'


기대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 것. 나 스스로 우뚝 서 주어지는 것에 만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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