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앉은뱅이 상 위에 냄비 수북이 닭백숙이 담겨 있고, 겉절이, 깍두기, 풋고추와 된장, 소금 등이 놓여 있었다. 원래 고기를 즐기지 않는 데다,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음식이 입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찹쌀죽만 홀짝거리는 그녀에게 남자가 닭다리를 뚝뚝 뜯어 그릇으로 옮겨주었다.
- 오늘 혜수 씨 만나러 간다니까 어머니께서 아가씨 몸이 너무 약하다고 걱정하시더군요. 이런 거 많이 드셔야 해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목침 뒤에 도사린 선악과를 어떻게 처리할지에만 신경이 곤두섰다. 혜수는 자기 그릇에 놓인 고기를 남자 그릇으로 옮겼다.
- 이러면 반칙이에요. 일단 이거 하나라도 드세요. 그거 드셔야 청혼합니다.
- 닭다리 하나로 멋진 남자를 살 수 있다니요. 제가 종훈 씨보다 영어 공부는 잘한 것 같으니 조금 긴 영어 문장으로 감사 인사드릴게요. “Thank very much for your commercial dealing!”
- 휴우! 앞부분은 충분히 이해하겠군요. 누구 앞에서 공부하지 못한 게 부끄럽기는 처음이지 싶습니다. 대학 가서 열심히 해야죠.
- 외모, 재산도 경쟁력, 종훈 씨 조건으로 모든 걸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저 예쁜 여자 좋아했거든요. 혜수 씨 알고부터 이상형이 백팔십도 바뀌었어요.
- 제가 ‘안 미인’이라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종합적으로 칭찬 같아 기분 좋군요. 근데 왜 본인을 자꾸 무식한 쪽으로 세우려 들죠? 꽤 수준 높아 보이는 책도 차 안에 있더군요.
- 우리 아버지 건데, 혜수 씨 수준 맞춰 골라 챙겼어요. 한 페이지조차 열지 않았습니다만.
- 차는 누구 거예요?
- 형님 거, 아가씨와 데이트 한다고 빌려 달라 했더니, 제대로 된 아가씨라면 차 때문에 퇴짜 맞을 거라고, 혜수 씨와 결혼하게 되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구나!’ 아마 엄청 놀랄 거예요.
백숙 국물 한 점 없이 깨끗이 비운 그는 땀을 뻘뻘 흘린 것이 무안한지 물가로 가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수는 밥 먹는 내내 선악과에 이브가 당한 것을 생각했다. 물욕을 인간본능의 하나로 합리화하며 돈을 몽땅 꺼내 자신의 핸드백 속으로 넣었다.
남자가 있는 물가로 갔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원두막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식당 아줌마가 상을 치우고 이어 그들과 같은 남녀 커플이 들었다.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 체했는지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파요.
혜수의 재촉에 남자가 걱정하는 얼굴로 일어섰다.
- 식당에 소화제 있는지 알아볼까요?
- 아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 일단 시내로 나가서 약국을 찾아봅시다.
-...
그들은 계곡에서 일어나 자신들이 묵었던 원두막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고 혜수를 앉힌 뒤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켰다.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고 느끼던 순간, 후진 기어를 넣던 남자가 차를 세웠다.
- 잠깐만요, 뭘 잊고 와서.
차에서 내린 그가 헐레벌떡 원두막 쪽으로 뛰어가는 듯했다. 몸을 돌려 그를 지켜보던 혜수는 아연실색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점퍼였다.
-%^&*!@#$%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 문을 열고 잠바를 뒷좌석으로 훌러덩 던진 그는 주행기어로 바꾸고 출발했다.
공포였다! 지구가 멸망하거나 차가 땅속으로 꺼지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남자가 점퍼를 입거나 손에 들거나 한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작은 손가방을 뒷좌석으로 던졌고, 그 또한 차 뒷좌석에 두고 내렸음만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약국에 들르자는 걸 혜수가 결사항전으로 맞서며 집으로 왔다. 혜수의 만류에도 기어이 집까지, 어머니에게 인사까지 하고 돌아갔다.
남자는 매일 혜수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혜수는 거부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거나 발작할 듯했다.
- 뭐 잘났다고 그 좋은 총각을 마다 하노? 대학을 나오기를 했나, 가진 게 많기를 하나? 니 주제에 그런 남자면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지....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순옥이가? 아무래도 저기 미친 기라, 속을 알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건강한 남자가 그라마 입도 못 마출까 봐, 아이라카께네. 그날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왔어, 저기 얼마나 고집이 센데, 같이 잤을 리가 없다, 첫날 밤이라도 보냈으면 고맙구로. 달래보께..."
동생이 있는 자리에서 어머니와 순옥 언니의 통화를 듣는 일은 참담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밀실에서 공유해야 할 엄밀하고 내밀한 성(性)을 어머니가 전화선으로 만방에 고하는 것 같아서였다.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타고 다니는 것처럼 수치스럽고 민망한, 견디기 힘든 지옥이었다.
동생이 대구로 떠난 다음 날 총각 어머니가 혜수네 집을 찾았다. 어머니는 상감마마라도 행차한 듯 버선발로 뛰어내려 마루로 안내했다. 허둥대며 미숫가루 휘휘 저어 쟁반에 받친 뒤 대령했다. 그럼 다음 혜수까지 끌어와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 이리 누추한 집을.
- 무슨 그런 말씀이세요? 미숫가루가 고소하니 맛있네요.
- 좋은 거 넣는다고 다 넣었는데, 입에 맞으시다니 흐흐흐흐.
- 아가씨, 우리 종훈이가 그날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
총각 어머니의 사모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혜수를 보다못한 어머니가 민망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가 혜수를 툭 치며, 손님을 향해 대변했다.
- 아이고 사모님, 건강한 총각이 처녀한테 실수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예. 지도 주제를 아는지라, 본인이 딸린다고 생각해서 그럴 낍니더.
어머니는 횡설수설했다. 발에 상장이 채인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딸을 무지막지하게 끌어내렸다. 어머니의 속내가 빤히 짐작되었다. 이미 총각이 딸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매가 사냥감을 포착하듯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 첫날 다방에서 저희가 좀 무례했죠? 다른 의도는 없었고 오로지 너무 약해 보여 걱정했을 뿐이에요. 좀 더 시간 가지며 서로 알아가는 건 어떤지요?
중죄인처럼 꿇어앉아 손톱만 만지작거리던 혜수가 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단 1초라도 빨리 교장댁이 갔으면 싶어서였다.
손님이 돌아가자 어머니가 말폭탄을 쏟아냈다.
- 합천군에서 이름난 집안이다. 저런 집안에 시집가는 건 버드나무가 가장 좋은 땅에 심기는 기라, 선생 월급 얼마 돼서 7남매를 저리 훌륭하게 키웠겠노, ○○면에서도 훌륭한 집안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하찮은 교장질(?)에서 어느새 위대한 교육자로 재탄생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혜수는 도망치듯 대구로 달아났다. 더는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운명인지 그녀를 버리고 첫사랑 남자가 찾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구청장에 당선되었다. 대구에서는 깃발만 꽂으면 되는 당 소속이어서 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즉시 축하 난을 보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152.5cm 드림.”
밀려드는 축하 난, 꽃바구니 화환 등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는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구청장 취임식이 있은 지 한 달이 되어가던 무렵, 친정인 대구에 갈 일이 있었다.
일찌감치 SRT를 타고 내려가 박종훈이 근무하는 구청에 들렀다. 수표 한 장을 동봉한 편지를 직원에게 부탁하고, 얼른 관청을 빠져나와 택시에 올랐다.
*박종훈 구청장님께.
그날(!)) 제가 박종훈 씨 점퍼에 있던 돈을 가져왔습니다. 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홍글씨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부디 저의 가슴팍 죄의 흔적을 지워주시옵기 바라오며….
김혜수 드림.
그날 저녁, 오빠 집에서 그의 톡을 확인했다.
“수십년 동안 제가 그 돈을 잃고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지 아세요? 기껏 이것으로 주홍글씨 떼 달라구요? 어림없어요! 만나서 직접 뗄 기회 주시지 않으면 언론에 퍼뜨리겠습니다.
○월 ○일 서울 갈 일이 있습니다. W 호텔 11:30….”
W호텔 뒤로 펼쳐진 산에는 벌써 가을이 오고 있었다. 통유리 너머 보이는 한강에 청명한 하늘이, 그 위로 물새들이 몇 폭의 병풍을 수놓는 듯했다.
-백오십삼센티미터 김혜수 작가님!
그는 수행비서와 함께 등장했다.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한 뒤 비서에게 열차 시간에 맞춰 오라 이르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표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날 돈의 행방에 대해 조금도 혜수를 의심하지 않았단다. 그들이 나온 후 바로 원두막에 들어간 젊은 커플을 의심했지만, 모른다는 소리에 더 따지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황진이 서경덕이 놀다 간 계곡바위… 선명한 글씨로 새겨진 원각(原刻)의 비석….”
산그늘이 통유리 창으로 들어오는 동안 어느새 글씨 원형에 이끼가 끼고 더께가 앉으며, 이름 모를 비석처럼 글씨가 희미해져 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자리,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오르는 동안, 어느새 자연과 동화된 비석과 어우러진 한 편의 수채화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