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혜수가 다방에 들어가자 총각 부모, 그리고 순옥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즉 순옥 언니가 소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혜수는 남자 쪽 사람들이 자신을 탐탁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아래위를 훑고 내려가는 눈길에서 이미 끝난 게임이라는 걸.
키는 153cm에 미치지 못했고 몸무게는 38~39kg를 왔다 갔다 했으니.
저쪽에서 좋다 하면 꼼짝없이 가야 할 신세였다.
마음 한편 오히려 잘됐다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가 금세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설레발을 쳤다.
- 야아가 보기는 이래도 야무집니더. 학교 다닐 때는 내내 전교 1등을, 집 안 구석구석에 상장이 발에 채이고, K사에서도 일 잘한다고 아아를 안 놔 줄라케서 결혼이 늦었다 아입니꺼.
코미디언이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데 아무도 웃어주지 않았다. 관객의 무반응은 전염성이 강해 더 큰 침묵을 불러일으킨다고 들었다. 마당놀이판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어머니를 고매하신 양반들이 비웃음과 조롱을 던지는 듯했다.
‘저 미천한 것들!’
사이사이 추임새라도 순옥 언니가 넣어주면 좋았으련만, 자신에게 주어진 단역조차 소화해 내지 못했다.
아까 다방에 들기 전 바깥에서 혜수를 본 순옥 언니의 첫마디는 ‘우째 너는 너의 언니 오빠들보다 키가 영 작네, 중학교 때 본 그대로구나!’였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된 혜수를 그날 처음 본 성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다고 소문난 혜수가 명문여고 진학했다는 소문만으로 먼 시가 친척 부유한 가문에 줄을 놓았으리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 판임을 진즉 깨닫고 서둘러 장을 마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앞 구르기 뒤 구르기, 공중회전돌기까지 마친 어머니의 외로운 퇴장을 끝으로 경기는 종료되었다. 저쪽에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총각 부모는 대구에서 아침 차를 타고 온 순옥 언니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며, 그녀에게 점심을 사주겠다면서 자기 아들 눈치를 살폈다.
- 우리랑 같이 가겠니? 아가씨 점심이라도 사 줄래?
총각이 고개를 움직이는 듯했으나 앞뒤 방향인지 옆인지, 대각선으로 끄덕였는지 애매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도 여태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듯했다.
어른들에 의해 결정되고 종료되었다.
- 어려운 자리 했으니 둘이 좀 더 시간 보내 봐요. 사람 인연 알 수 없어….
어머니가 못내 아쉬운 듯 총각을 향해 구걸하듯 말하자 테이블에서 몸을 뺀 그의 부모가 조소하듯 어머니를 흘겼다.
- 우리 ○○반점에 있을 테니 연락해라.
남자가 부모의 말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어른들이 모두 떠나고 둘만 남았다.
‘밥 한 끼 사주겠다는 적선인가?’
혜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 안녕하세요? ‘박종훈’이라고 합니다.
- 김혜수예요.
- J여고 졸업하셨다구요?
- 맞는 것 같아요.
- 내내 전교 1등을 하셨다는데, 왜 대학을 가지 않았는지요?
- 아아, 그거요? 어머니가 거꾸로, 뒤에서 1등이란 말이지요.
- 푸흡! 하하하하... 그럼 발에 차이는 상들은요?
- 초·중·고 개근상만 정리하지 않고 늘어놓아도 발에 걸리지요.
- 킄킄킄킄 하하하하....
- 제가 웃겨드릴 수라도 있어 다행입니다. 펼쳐놓은 마당에서 카메오로라도 출전하지 못할까 봐 마음 졸였거든요.
- 저에게 뭐어 궁금한 거 없으세요?
-...
혜수는 남자가 ‘카메오’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분위기 전개상 더 웃어야 하는데 멈춘 걸 보면.
- 어머니가 총각 댁 집안 역사를 며칠에 걸쳐 읊으셔서, 외울 정도입니다.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저에게 물어보세요.
남자는 다시 특유의 큰 웃음소리를 다방에 날리느라 재채기와 기침까지 동반했다. 겨우 진정하고는 따스한 눈길로 말했다.
- 식사하러 가시겠어요?
- ….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방으로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카운터로 전화를 받으러 가는 그의 뒷모습이 훤칠하고 반듯했다. 어차피 그와 진도를 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밥을 먹으면 빚을 지는 셈이니, 가지 않는 게 도리일 듯했다. 그러나 다방에 좀 더 있어야 했다. 읍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띄엄띄엄 있기에, 자칫하면 어머니와 같은 차를 탈 수밖에 없어서였다.
전화를 받은 남자가 자리로 돌아왔다. 보나마나 그의 부모가 식당으로 오라고 한 것 같았다.
- 가시지 그래요?
- 같이 가실래요? 불편하시면 다른 식당이라도?
-...
혜수의 막차 시간까지 두 사람은 다방에서 보냈다.
캄캄해질 무렵 집으로 온 까닭은 어둠이 어머니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민망함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늦게 온 그녀를 어머니가 반색했다.
- 부모가 아무리 반대해도 남자만 좋다 하면 된다. 우떻더노?
- 분위기 보셨잖아요. 어른들 가고 곧장 헤어져 저는 연호사 절 그늘에서 책 읽다가 왔어요.
- 교장질 해X먹고 사는 인간이 어째 눈높이가 그거 빼끼 안 되노! 아가씨 앉혀놓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예의대가리라곤 없어, 사람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저런 집구석에 가봤자….
매일 방이나 대청마루에서 4인용 포마이카 상을 펼치고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안방에서 전화를 하거나 받거나 하는 어머니의 통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몇 날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순옥 언니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느껴졌다.
- 총각 집에서 뭐라카던고?
- 아가씨 키가 너무 작고 약하다 카데예. 우째 그리 키가 안컸능교? 언니 오빠들은 다 훤출한 미남 미녀인데.
- XX염병하고 자빠졌네. 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다 캐라! 교장이 무슨 대단한 유세라꼬… 우리 양반도 보통학교 나와 선생 할래 카는 걸 공무원 했구마.
어머니는 순옥 언니에게 총각집에 대한 온갖 악담을 퍼붓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탁 끊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정이 많은 어머니였지만 부잣집 사람들과 각을 세울 때는 과부의 설움까지 폭발한다는 사실을 혜수는 모르지 않았다.
욕이나 비난의 강도가 셀수록 부러움이 크다는 것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 매미가 천지를 진동하듯 울부짖었다. 7월이 중순을 넘어 하순으로 막 넘어가던 무렵, 여름휴가를 받은 동생이 집에 왔다.
천재라 불리던 그가 가족의 부주의로 반신 마비된 장애인이 된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하듯 갈가리 찢겨졌으며 혜수의 인생도 그에 따라 출렁였다.
무지막지한 회오리가 잠잠한 소강 상태로 접어든 것은 그러한 몸으로나마 그가 취직하면서 부터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망각이라는 장치가 가동되기도 했으나, 막상 눈앞에 보이면 사정이 달랐다.
동생의 기우뚱한 몸을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웠으니.
특히 어머니와 동생이 한 액자에 담긴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화의 정수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생이 온다는 소식에 혜수는 벌써부터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남자에게 실연당한 채 삭발한 모습으로 시골로 숨어든 꼴이었으니.
동생에게 비참한 내색 않으려고 들로 밭으로 다니며 어머니 일손을 도왔다. 그런 혜수를 어머니는 잘도 포장했다.
- 너거 누나가 와서 내가 편타.
서로의 속내가 빤히 보이는, 동생 앞에서 어머니와 혜수는 철저히 공범 관계를 잘 유지했다.
동생이 집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가지, 호박, 오이, 깻잎, 열무 등을 한 소쿠리 따온 것으로 열무김치, 물김치를 담그고, 갖은 나물 반찬으로 오랜만에 양껏 저녁을 먹었다. 의지에 상관없는 움직임이어도 소모된 체력만큼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 안에만 들어있던 딸이 바깥으로 나와서인지,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는 수순으로 들어섰는지, 어머니도 표면적으론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와 동생은 평상에 앉아 옥수수를 먹고, 혜수는 마당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했다. 동생의 회사 생활에 관해 이것저것 물으며 잔잔한 웃음을 이어가던 평화를 안방의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깨트렸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한달음에 안방으로 달려간 어머니의 통화에 혜수의 귀가 쫑긋했다.
- 순옥이가? 집에 있다, 바쁘기는, 하모, 맞다, 사람이 우째 첫눈에 백 프로 마음에 드는고, 알아가미 정드는 기지, 내일? 오냐, 고맙데이.
통화를 마친 어머니가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마당 수돗가에서 설거지하는 혜수 쪽으로 왔다.
- 총각이 내일 읍에서 만나자 칸단다. 휴가 왔다카네.
이유 없이 동생에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밤하늘에 서글프도록 별이 총총했다. 빈곤 속 풍요처럼.
직장 다니는 동안 큰오빠네서 살았던 이유는, 신혼살림이었지만 한사코 올케가 시누이 혜수를 내보내려 하지 않아서였다. 큰오빠 내외가 혜수의 연애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부끄러웠다.
첫사랑 상처를 안고 직장 마무리 뒷일까지 오빠에게 미룬 채 사지를 탈출하듯 도시를 떠났다. 속옷 몇 개만 챙기고 변변한 옷조차 가져오지 않은 것은, 명절이나 휴가 때 집에 오면 늘 어머니 몸뻬 바지나 블라우스, 티셔츠 등을 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총각과의 맞선 후 어머니는 남자 부모로부터 점수를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옷차림을 들었다.